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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군자
양상군자 ⓒ 정수권
지난 주말(13일), 경북 영양군 입암면의 입암중학교 제1회 졸업생 20명이 35년 만에 금호강이 흐르는 대구의 동촌유원지 한식당에서 동창회를 준비하는 첫 모임을 가졌다.

시골이라 초등학교도 같이 다녀 대부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났었지만 그중에 대여섯 명은 금방 알아보지 못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어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웠다. 학창시절 추억을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젠 주고 받는 안부도 “아들, 딸 결혼은 시켰느냐”로 바뀌었다. 결혼한 여자친구들 중에는 벌써 손자를 본 친구들도 있었다. 그것을 보며 세월이 덧없이 빠름은 실감했다.

잠시 후 선배들의 모임 소식을 듣고 격려차 달려온 후배 동창회장단 일행이 도착했다. 후배들은 모임을 축하한다면서 앞으로 매년 모교에서 열리는 총동창회 체육행사에 꼭 참석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아울러 모교는 올해로 35회 졸업생을 배출했고 전교생은 현재 37명이라고 전했다.

자꾸만 줄어드는 농촌 인구로 대부분 시골학교가 폐교되어 없어졌지만 그래도 아직 학교가 남아있다는 것이 대견스러웠다. 총동창회장(3회, 안해충)은 내년에도 들어올 신입생이 있으니 선배님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모처럼 모인 자리이니 즐겁게 보내시라며 봉투 하나를 슬며시 내어놓고 돌아갔다.

우리의 이야기는 밤늦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다음 모임을 위한 회비와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동창생들이 보내준 성금을 모으고 임원을 선출했다. 이번 모임을 주선하고 애쓴 창수가 다음 모임 때까지 임시회장을 맡고 시원이를 총무로 선출했다. 이후 간단한 회의를 마치고 인근 노래방으로 뒤풀이를 갔다. 밤이 이슥하도록 회포(?)를 풀고 숙소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숙소에 와서도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고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밤을 하얗게 새웠다.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인 1968년 3월 어느 날 나는 인근 중학교에서 입암중학교로 전학을 왔다. 새로 생긴 학교라 대충 짐작은 했지만 친구들 따라 학교라고 들어간 곳은 신작로 옆 면사무소 회의실로 쓰던 낡은 목조건물이었다. 63명 한반이 전부였다.

전입 인사를 하고 오전수업을 대충 마치자 오후에는 학교터를 닦으러 가야한다며 마을 집집마다 다니며 삽과 곡괭이를 빌렸다. 빌린 삽을 울러 매고 한 20분을 걸어가니 높다란 언덕 위에 보리밭이 보였다. 아직도 파릇한 이 보리밭이 바로 우리학교가 들어설 터라고 했다.

비탈에 선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마저 차가운 황량한 보리밭을 삽과 곡괭이로 파기 시작했다. 경사진 높은 곳의 흙을 파서 낮은 곳으로 옮겨 평평하게 하는 작업이었다.

요즘 같으면 굴삭기로 한나절이면 반듯하게 끝낼 일을 매일매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파서 들것으로 실어 날랐다. 그 후로도 작업은 계속 되었다. 어느 정도 땅이 평평히 고르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땅이 질척해서 비만 오면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복 한 시간이 넘는 거리인 반변천에 가서 여학생은 가방에 돌을 담아오고, 남학생은 리어카로 자갈과 모래를 실어 날랐다. 그와 동시에 한쪽에서는 교실을 짓기 시작 했다.

수업의 태반이 야외수업이고 거기서 반은 학교 만드는 작업이었다. 어차피 하기 싫은 공부라 잘 되었다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눈비 내리지 않는 날이면 거의 매일 이루어지는 작업에 지쳤다. 그런 걸 견디지 못한(?) 학생들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는 바람에 나중에 남아 졸업한 학생은 42명뿐이었다. 짬을 내어 쉬는 시간에 배구시합이라도 하다보면 조금만 잘못 쳐도 언덕 밑으로 날아가 공을 찾아오는데도 한나절(?)이 걸렸다. 그러나 여름철 시원한 나무 그늘 밑 수업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드디어 그해 늦은 가을 어느 날, 평평한 운동장과 두개의 교실이 완성되어 새 교실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이듬해 후배 신입생을 새 교실에서 맞았다. 그런데 교실만 있고 교무실이 없다보니 멀리 떨어진 기존 면사무소의 부속 건물에 있던 교무실을 계속 사용하니 수업이 시작되고도 10분 이상 지나서야 선생님이 교실에 도착하곤 했다.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가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으러 어젯밤 모였던 식당으로 갔다. 식사가 차려지는 동안에 아직도 못다 한 얘기를 나누는데, 총무인 시원이가 어제 모임에서 입금된 돈과 경비 지출을 보고하기 위해 식당 주차장에 세워둔 차안에 봉투를 가지러 갔다가 누군가가 그 봉투를 훔쳐가 버렸다며 양손을 벌리며 벌레 씹은 얼굴을 하며 들어 왔다.

몇몇이 경찰에 알리자고 했으나 다들 신고해봐야 찾지도 못하고 번거롭기만 하다며, 모처럼 좋은 모임에 그럴 필요 있느냐며 다음에 십시일반 더 모으기로 하고 일단락 지었다.

모두들 시원이를 위로하였으나 그는 미안한 맘에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 내가 나서서 괜찮다며 다음번 모임에 돈 많이 벌어서 회비 듬뿍 내라며 해장술 한잔을 권하자 그제야 씩 웃는다. 그러자 옆에 있던 회장인 창수가 “참, 수권이 너 오마이뉴스 기자 아니냐? 내일 당장 글 올려서 도둑놈더러 돈은 썼더라도 회원명부는 돌려 달라고 해라”고 하였다.

컴퓨터로 문서 작성이 서툰 그가 모든 장부를 일일이 손으로 쓰다 보니 모두가 원본이라 복사본이 없다고 했다. 내가 알았다며 그러마고 웃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벌써 오전 10시가 넘었다. 올 가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아쉬운 작별을 나누며 일부는 이번 모임에 오지 못한 서울에 있는 동창인 갑섭이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차 서둘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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