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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신문
[이은경 기자]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효를 이젠 국가·지역공동체가 나누어 실현해야 하는 ‘사회적’ 효 시대로 접어들었다. 평균수명 100세, 65세 이상 400만 시대, 2020년엔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달할 초고령화 사회, 저출산 사회의 당연한 귀결이다.

일반인들도 더 이상 ‘효’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서 전통적 의미의 효가 유지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40% 이상이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것도 이를 방증한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기존 효에 대한 관념을 바꿔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여성학자들은 여성의식의 향상과 활발한 사회진출, 가족주의보다는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추세 속에서 효를 실행할 주체가 모호해졌음을 지적한다.

기존 가부장제 전통사회에선 부모 봉양의 실질적 의무를 ‘가장’인 남편의 영향력 아래 아내가 수행했지만, 가족관계가 수평구도화됨에 따라 이 같은 가장의 명이 더 이상 아내에게 통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 역작용으로 남성에 의한 부모 학대 사건이 빈발하기도 한다. 또 효를 실행할 자식에 대한 기대도 접을 수밖에 없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에 따르면 전근대 농경사회에서 생산력으로 인식됐던 자식의 가치가 자본주의 사회에선 오히려 투자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소비재’로 인식되고 있다.

한혜경 호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기존 대다수 노인복지 관련법들의 기본 이념이 ‘경로효친’ 사상인데, 이를 국제사회 기준에 맞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유엔 등 국제사회에선 노인복지의 기본 원칙을 사회적 일자리 창출 등 ‘참여’와 금전적 안정을 포함한 ‘안전’ 그리고 ‘건강’ 3가지로 꼽고 있다. 이를 참고해 노인의 독립과 자활을 꾀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것. 이와 관련해 여성계에선 정부안으로 국회 계류 중인 노인수발보험법안에 대해 ‘수발’이란 말 자체가 ‘모시는’이란 의미여서 아무리 순수 우리말이라 해도 현재의 노인복지 개념과는 맞지 않다는 의견이다.

10여 년간 소규모 노인요양시설을 운영해온 김정희 은성원 원장은 “사회복지는 ‘권리’라지만 초고령화 사회에선 공급보다 수요가 훨씬 많으므로 개인도, 국가도 노인복지 문제를 감당할 수 없고, 결국 노인들이 젊은층에 빚을 지며 살아가는 형편이 될 것”이라며 “노인복지 서비스도 무한대로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 어느 정도 자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엔 지난해 6월 열린우리당에선 유필우 의원이, 한나라당에선 황우여 의원이 발의한 ‘효 실천 장려 및 지원 관련 법안’이 계류 중이다. 두 법안의 골자는 지금처럼 효 사상이 약화돼 부모 봉양을 꺼리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센터를 만들어 행정적으로 효심과 효행을 북돋운다는 것. 기존 효 관념에 바탕을 둔 이들 법안에 대해 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 입법심의관은 과거 효 사상에 근거해 이를 법률로 정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다.

가족복지 기능을 했던 과거의 효에 집착하기보다는 현재의 사회적 환경과 의식변화 차원에서 노인문제를 접근해야 한다는 것. 그는 “노인문제는 가족 구도의 변화와 지원의 관점에서 봐야 하며, 현행 건강가정기본법 논의를 확대해 가족지원 관련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부모-신세대 자식... 새로운 관계맺기 절실
저출산 고령화 시대 효의 개념 변화... 노년 자족·자립 방안 찾아야

▲ 며느리, 손자와 함께 공예를 즐기는 노부부.
고령화 시대, 젊은 세대는 우선 부모와의 일정한 ‘거리 두기’가 필요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면에서 노인들의 의식 변화와 때론 적응 교육을 요구한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자식에 대해 요구하고 섭섭함을 토로하는 대화법으로 일관하면 자식과의 관계 개선은 힘들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젠 자식과도 사이좋게 지내는 구체적인 요령을 배울 수 있으면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달라진 사회... 적응교육 필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정착한 40대 초반 여성 B는 "남편이 장남이기에 한국에 있었으면 어떤 상황에서든 시부모를 모실 수밖에 없었을 테고, 오히려 이 편이 피차 편했을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장남이 부모님을 모실 수 없다면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온 주위가 다 불편해하는 게 한국 정서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미국 노인들의 경우, 부모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올인하지도 않으며, 자식 역시 부모 도움을 받지 않고 독립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기에 자식이 부모가 따로 살 집이나 양로원 등을 주변에 문의하는 것도 극히 자연스러운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한편에선 가부장제가 약화되면서 아들이 며느리에게 더 이상 부모에 대한 효를 강요하지 못하는 한계도 지적한다.

반면 ‘효’의 굳건한 통념 아래서도 기존 관행에 대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잘 모시지 못할바엔 요양시설에"

무엇보다 기본 수명이 100세, 환갑 잔치는 낯간지럽고 미수(88세) 잔치가 기존 환갑잔치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에선 ‘오래 살며 아픈 것’이 곧 자식을 불효자로 만드는 지름길로 여겨진다. ‘임종을 지키지 못하면 불효자’란 통념도 이젠 옛말. 자식과 따로 살거나 함께 살더라도 옛날처럼 밀착된 생활을 하지 않기에 임종이란 ‘숨 넘어가는 순간’뿐만 아니라 ‘서서히 의식을 놓아버리는 과정 혹은 임종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김정희 은성원 원장은 "10년 전 노인요양시설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자식들은 남들이 알까봐 몰래 부모를 시설에 맡겼고 시설에서 부모가 임종을 맞은 것을 더할 수 없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이젠 많이 달라졌다"고 전한다. "집에서 부모님을 모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며 봉양의 질적 서비스를 우선 생각해 과감히 전문가 집단에 부모를 맡기는 자식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자식들은 당당히 "더 믿을 수 있어 시설에 맡기고 갑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고.

그렇다면, 노인들은 어떨까.

"지역활동 등 스스로 노후 개척"

여성학자 구훈모(68)씨는 "자식이 집에서 노인을 모시는 의의는 자주 들여다보고 대화를 나누며 가족유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너무나 바빠 그럴 여유가 없는 젊은 세대와 귀가 어두워 의사소통 자체가 힘들고 주 관심사가 ‘얼마나 내 몸이 아픈가’에 집중돼 있는 노인들이 같은 공간에 함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반문한다.

은퇴한 남편이 지역에서 노인정 회장으로 3년째 활동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구씨는 "노인정 운영만이라도 지역주민들이 관심을 가져서 일종의 데이-케어 센터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노인들에게 성공한 노년의 삶이란 잘 키워낸 자식과 살다가 편안히 눈을 감는 것이 아니다. 자식은 어쩌다 한번 보면 족한 것이다. 노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을 하든 스스로 노후 해결을 하고, 배우자와 건강한 파트너십을 맺어가면서 젊어선 바빠서 신경 못쓴 지인들과의 교류와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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