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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 안준철
요즘 학교가 온통 꽃밭입니다. 사월 하순이라 철쭉이 한창이지요. 학교 등나무 터널에는 연보랏빛 등꽃도 피었고요. 황사가 지나간 하늘도 오랜만에 파란 물감을 머금었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만사를 제쳐두고 아이들에게 꽃구경이나 시켜주면 좋겠는데 공교롭게도 지금 학교는 중간고사 시험 중입니다.

시험감독을 하다가도 자꾸만 눈이 창 쪽으로 갑니다. 나무에 불이 붙은 듯 활활 타오르는 철쭉의 눈부신 자태를 외면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긴 꽃이 피기 전에도 아침식사 중인 동산 어린 나무들에게 종종 눈길을 빼앗기곤 했었지요. 작년 가을이네요. 그날도 아이들은 중간고사를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 꽃.
ⓒ 안준철
중간고사 시험감독을 하던
늙수레한 선생의 준엄한 눈빛이
팽팽하던 고무줄이 끊기듯
탁, 허니 풀어졌다.

시월 초아흐레
알맞게 식은 햇살이 쏟아져 내려와
동산 어린 나무들이
아침 식사 중이시다.

불과 이삼 초
반쯤 열어진 창문 사이로
잠시 외출 나갔다가
화들짝 놀라 돌아오는데

가만 보니
시험지에 코 박고 있는 아이들
머리통에 죄다
검은 잎들이 돋아나 있다.

저 어린 나무들은
아침밥이나 먹고 와서
시험을 보고 있는 건지
늙수레한 선생은 괜한 걱정이다.

- 자작시, <나무들의 식사>


▲ 꽃.
ⓒ 안준철
오늘 저는 학교 등나무 아래에서 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담임을 맡았던 아이인데 안타깝게도 기대했던 취업시험에 붙지 않아 속이 많이 상해 있었지요.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늘 명랑하기만 하던 아이가 얼마나 실망이 컸으면 교무실 바닥에 주저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을까요?

위로라도 해주려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교실로 찾아갔는데, 마침 청소시간이어서 아이가 자리에 없었습니다.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교실로 찾아가려다가 그보다는 아이가 하교하는 길목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싶어 등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때 연보랏빛 등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는 곳을 택하여 일부러 서 있었던 것은 슬픈 낯빛으로 다가온 아이에게 그윽한 꽃향기를 맡게 해주려는 속셈이었지요.

▲ 나무.
ⓒ 안준철
길이 엇갈렸는지 끝내 아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1학년 귀염둥이들이 그곳을 지나가다 저를 보고 달려왔지요. 저는 그 아이들에게 머리 위로 핀 등꽃을 손으로 가리키며 향기를 맡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매일 같이 이곳을 지나면서 꽃을 바라보고 꽃내음을 맡으면서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말을 하는 제가 조금은 우스운지 입가에 웃음을 머금더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 아이들.
ⓒ 안준철
잠시 후, 교무실로 돌아간 저는 작년 교무수첩에서 아이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습니다. 불통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이의 단짝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습니다. 다행히도 전화를 받았습니다. 더 다행스럽게도 두 아이가 함께 있었습니다. 목소리도 생각보다 씩씩했습니다.

"선생님, 저예요. 웬일이세요?"
"너 아까 교무실에서 우는 거 보고 선생님 마음이 좀 그랬어. 그래서 위로해주려고 등나무 아래에서 기다렸는데 길이 엇갈렸나 보구나."
"저는 다른 쪽 계단으로 내려왔어요."
"목소리가 씩씩한 걸 보니 마음이 좀 나아졌나 보네?"

"선생님, 제가 아까 교무실에서 왜 울었는지 아세요? 제가 떨어진 것이 병결 때문이어서 그랬어요. 몸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하겠다. 그런데 앞으로도 다른 반도체 회사에서 취업의뢰가 많이 올 거야. 근무 조건도 비슷하거든.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 알았지?"
"예. 그럴 게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나도 고마워. 어제 메일 보내준 거. 답장했으니까 읽어보고."

어제 아이가 저에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뜻밖의 편지였지요. 메일을 열어보니 내용은 더욱 뜻밖이었습니다.

- 선생님 저 ○○예요. 요즘 선생님을 보면!! 작년 우리 반 애들 때문에 선생님이 고생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저희들 때문에 작년에 속도 많이 상하셨을 텐데 진짜 지금 생각하면 너무 철이 없었던 행동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진짜 죄송하다는 말을 너무 하고 싶었는데 실제로 보면 못하겠어요. 선생님∼ 그래도 작년 저희반 애들이 선생님 정말로 좋아했던 거 아시죠?? 선생님처럼 우리들을 한사람의 인격체로 생각해 주셨던 분은 없었던 거 같아요. 조금만 더 잘할 걸... 이라는 생각을 요즘 너무 자주 해요!!

아∼ 선생님 저 저번 주 금요일 날 면접 봤어요. ○○ 회사예요.
붙을지 안 붙을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최선을 다해서 면접 봤으니깐 좋은 성과가 나올 거라고 믿어요. 선생님도 그러시죠? 선생님!! 자주자주 메일 쓸게요∼∼ 답장 꼭 해주세요.


▲ 꽃.
ⓒ 안준철
편지를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지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몇 개월 남짓이면 철이 들고도 남을 아이들인데 알량한 사랑을 주고 억울해 했던 순간들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억울한 생각이 들만큼 아이들을 사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억울한 쪽이 제가 아니라 아이들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에게 보낸 답장입니다.

사랑하는 ○○에게

오늘 너의 편지를 받으려고 학교에서 그런 생각을 했었나보다. 3월까지만 해도 담임을 맡지 않아 참 편하고 좋았는데, 담임을 맡으신 선생님들이 반 아이들 때문에 속상해 하시는 것을 보면 올해 담임 맡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곤 했는데, 오늘은 그런 고생을 다시 한다고 해도 너희들하고 단합대회도 하고, 소풍도 가고, 생일 시도 써주고 그러고 싶었거든. 그런 중에 너에게 편지를 받으니 정말 너희들 많이 보고 싶구나.

선생님이 많이 부족했지만 너희들 하나하나 인격체로 대해준 것은 그래도 후회스럽지 않았는데 네가 그런 선생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참 흐뭇했단다. 메일 방에 들어가 작년에 너와 나눈 편지들을 읽어보았단다. 참 많은 얘기를 나누었더구나. 그런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하고 행복했단다. 남은 학창 보람있게 잘 보내고 취업 나가면 일도 열심히 배우고 그러면서 언젠가 얘기했던 네 꿈도 꼭 이루도록 해라.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어서 정말 기쁘구나. 그럼 오늘은 여기서 줄이마. 안녕!


▲ 꽃.
ⓒ 안준철
요즘 날씨가 참 변덕스럽습니다. 봄 날씨가 다 그렇지요. 저도 그런 변덕을 부릴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조금은 억울한 사랑을 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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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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