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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인종주의에 반대하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시위
11일 인종주의에 반대하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시위 ⓒ 신재명
4월 20일. 한국인들에게 4월 20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이 곳 러시아에 있는 모든 외국인들은 4월 20일과 이를 전후한 시기에 커다란 경계심과 두려움을 느껴야만 한다.

도대체 4월 20일이 무슨 날이어서 그런 긴장감이 조성되는 것일까. 그 날은 바로 히틀러의 생일이다.

그런데 왜? 바로 이 날을 중심으로 '스킨헤드(극단 인종차별주의자)'로 대표되는 파시스트 집단의 활동이 일년 중 가장 왕성해져, 언제 어느 곳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폭력과 테러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이 곳, 대부분의 러시아 각 가정 혹은 그 친지 가운데 히틀러와의 전쟁으로 인한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이 곳 러시아에서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활개를 친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거죠?"

얼마 전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들어와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는 다행히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작은아버지는 전사하셨다면서, 러시아 가정 혹은 그 친척들 중에서 그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가 대부분 있을 법한데, 젊은 아이들이 스킨헤드에 휩쓸리는 것을 자신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선생이 이처럼 화를 낸 이유는 3월 말 <이즈베스찌야>(뉴스라는 뜻의 신문으로 1917년 이후 발행)에 실린 여론조사 결과 때문이다. 그 결과에 대해 러시아 언론들조차 상당히 우려스럽다는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

12%, 파시즘 긍정성 인정

"파시즘에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제가 된 여론 조사 결과의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12%나 되는 사람들이 "예"라고 답했고, 76%는 "아니오", 나머지 12%는 "답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수치상으로 볼 때 '아니오'라고 답한 사람이 월등히 많긴 하지만, 12%를 러시아 전체 인구로 따져보면 무려 1500만 명이다. 즉 모스크바 전체 인구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파시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결과인 셈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 설문조사의 응답자 중 4명 가운데 1명이 히틀러식의 사회 문제 해결 방법을 따르는 추종자들에 대해 '전혀 위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점이다.

또 다른 질문이 있다.

"다른 나라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에 오는데 이것이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현상이라고 보십니까?"

69%가 부정적이라고 답했고, 21%만이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러시아 사람들 다수가 외국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결과인 셈이다. 이러한 인식이 바로 외국인 혐오증과 파시즘의 발호를 위한 비옥한 토양이 되고 있음을 이 여론조사 결과는 보여준다.

지난 4월 8일 귀가길에 총격을 받고 고인이 된 세네갈 유학생 영정.
지난 4월 8일 귀가길에 총격을 받고 고인이 된 세네갈 유학생 영정. ⓒ 신재명
청년들에게 구타당한 연방공화국 문화장관

공교롭게도 이러한 여론조사 결과 발표와 맞물려 지난 4월 초 상징적인 테러 사건이 모스크바에서 발생했다. 올해 54세로 유명한 러시아 로망스 가수이자 현 러시아연방 까바르지노 발까리야 공화국의 문화장관인 자우르 뚜똡이 바로 그 희생자였다.

그는 올해 13살인 딸을 마중하러 나갔다가 한 무리의 청년들로부터 온몸을 구타당해 머리와 얼굴, 손 등에 중상을 입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청년들이 "러시아인을 위한 러시아"라는 파시즘적 구호를 외치면서 달려와 그를 마구 폭행했다고 한다.

까프까즈 지방 출신으로 1974년부터 모스크바에 살면서 전 러시아를 누비고 다니며 왕성한 음악활동을 해온 자우르 뚜똡. 그는 전형적인 러시아인종은 아니지만 러시아 시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러시아 경찰과 검찰의 태도도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이 전 과정을 목격한 딸의 증언에 의하면,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에 늑장 출동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외쳤던 구호를 설명하자, 그 경찰이 "맞는 말을 외쳤네!"라며 도리어 맞장구까지 쳤다는 것이다. 모스크바 검찰청 또한 이 사건을 파시즘적 동기를 지닌 사건으로 인정하기를 극구 꺼리면서 단순한 훌리건의 소행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지난 한 해에만 러시아에서 26명의 외국인들이 파시즘 추종자들 혹은 이와 관련된 집단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스킨헤드로 분류되는 이들은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고,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신문이며 잡지가 100여종 이상 발행되고 있는 게 러시아의 현실이다.

파시즘은 그렇게 도래했다

지난해 11월 4일 모스크바 도심에서는 거리낌 없이 히틀러식의 손 인사를 하는 청년 나치 지지자들의 대규모 행진까지 거행되었다(당시 모스크바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필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우연히 그 옆을 지나치기도 했는데 다행히 불상사는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입으로는 이들에 대한 단속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실효성은 물론 의지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우익 성향의 일부 두마 의원들은 심지어 "그들의 존재 자체를 들어본 적도 없다"며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심각한 우려를 느낀 정치인들과 사회운동가들이 파시즘과 외국인 혐오증의 근절을 위한 새로운 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것이다.

이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상원의원 류드밀라 나루소바는 <이즈베스티아>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법원의 이중 잣대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

지난해 12월 초에 실시된 모스크바 시의회 선거를 앞두고 '로지나(조국)'라는 한 정당이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TV광고를 했다는 이유로 선거 참여를 불허하는 판결을 내렸던 법원이 파시즘, 반유태주의, 외국인 혐오증을 부추기는 다른 정치 집단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잣대도 들이대길 거부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교훈을 상기해야 한다며 러시아 정부의 조속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1930년대 독일에서 일군의 청년들이 뮌헨의 맥주 집에서 회합을 가질 때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파시즘은 그렇게 도래했던 것이다.” - < 이즈베스찌야 > 2006년 4월 3일

그러나 파시즘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이에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운동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파시즘이 발호할 수 있는 사회적 토양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문제 해결이 요원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현 사회경제적 상황, 즉 극심한 빈부격차, 일자리 부족, 각종 복지 시스템의 붕괴 등으로 인해 누적된 불만, 특히 청년 세대들의 경우 자신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손쉽게 어떤 외부적인 것을 표적으로 삼아 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러시아국립사범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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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비교정치, 한국정치 등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복지국가연구센터에 적을 두고 있다. 에식스 대학(University of Essex, UK)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박종철출판사, 2011) 저자이고,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평생회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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