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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되어 학교 식당에 가는 길이었다. 작년에 담임을 맡았던 한 아이가 나를 보더니 환한 얼굴로 달려와 반갑게 아는 체했다.

"선생님 요즘 왜 그렇게 보기 어려워요?"
"그래? 엊그제 우리 보지 않았니?"
"그랬나요? 그래도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작년에는 매일 만나서 그런가 보다."
"그때가 그리워요."

그립다는 말처럼 사람의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그것도 세상을 오래 살지도 않은 어린 학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서 그런지 느낌이 더욱 각별하다. 아무튼 요즘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들에게 그립다는 고 말랑말랑한 말을 듣고 산다.

그뿐이 아니다. 엊그제는 너덧 명의 아이들이 떼로 몰려와서는 이번 주말에 산에 가자고 졸라댔다. 담임이 아니어서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말도 안 된다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다. 한 아이는 내 가슴팍을 툭툭 찌르며 숫제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왜 안 되는데요? 선생님도 우리 담임선생님이셨잖아요."
"지금은 아니지. 나도 너희들과 산에 가고 싶지만 그건 안 되는 일이야."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 담임선생님 아니라 이거죠?"
"너희들 학교 졸업하면 그때 산에 가자. 알았지?"
"흥, 그땐 남자 친구들이랑 가지 선생님하고 왜 가요?"

▲ 꽃반지 끼고
ⓒ 안준철
그렇게 아이들과 사랑싸움(?)을 하다 보면 참 행복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아이들과 함께 산에 가면 안 되는지 한 번 따져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똑같은 아이들인데 담임이 아니라고 이렇게 달라져야 하다니. 아이들에게 전화를 하는 것도 그렇다. 작년에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 뿐만 아니라 반 전체 아이들에게도 한 달이 멀다 하고 집으로 전화를 걸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전화는 고사하고 아이들에게 전자메일을 보내는 것조차 망설여진다. 어쩌다 메일이 오면 답장을 해주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도 아주 길지는 않게. 작년 한 해 동안 아이들과 주고받은 메일을 출력하면 장편소설 분량의 꽤 두꺼운 책이 한두 권은 나올 성싶다. 가끔 컴퓨터에 들어가 빼곡히 적힌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그들과 주고받았던 얘기들을 뒤적이면 언제 이렇게 많은 메일을 주고받았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이다.

그렇게 마음을 쏟은 아이들이니 하루아침에 정을 뗀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교직사회의 불문율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런데 아이들이 하필이면 산에 가자고 졸라대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작년에 반 아이들과 자주 산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땐 내가 아이들에게 산에 가자고 졸라대곤 했었다. 담임을 잘못 만나 고생한다고 투덜거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 시절이 그립다고 야단을 떨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들으면 섭섭할 말이지만 올해는 담임을 맡지 않으니 정말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담임이 하는 일이 그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하루 일과가 한산하다. 거기에 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심리적인 압박감까지 보태면 그때가 그립다는 아이들의 말이 내게는 징그럽게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한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만큼 값지고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 까치집
ⓒ 안준철
다른 것은 몰라도 아이들의 마음 밭에 그리움을 심어주었다는 생각을 하면 그래도 적잖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잎 다 져 버린 앙상한 가지 끝에 까만 둥지 하나 달고 있는 기분이랄까. 아니면, 산등성 아름다운 곡선으로 남은 겨울 잡목이 된 기분이랄까.

잎이 무성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겨울 미루나무
앙상한 가지 끝에 달린
까만 둥지 하나

한 생애의 이파리가 다 지고 나면
누군가 날아와 깃들일
따뜻한 둥지 하나
내 안에도 남아 있을 것인가

잎 다 지고
산등성 아름다운 곡선으로 남은
겨울 잡목들을 지나
새 한 마리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
그리운 사람이 되겠느냐

-시, '둥지' 모두


교사의 사랑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아이들의 가슴에 어떤 그리움을 심어주는 것도 현재에 충실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과거의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은 잠시 접어두고 새롭게 다가온 아이들에게 푸른 미소를 보여주어야 한다.

며칠 전 일이다. 교실에 들어가 출석을 부르고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아이들의 눈이 게슴츠레 풀려 있었다. 손뼉을 쳐서 주의를 환기시켜도 잠시 모아졌던 초점이 금세 다시 풀어졌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다고 혼자서 수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잠시 책을 덮게 하고 이런 말을 해주었다.

"요즘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로 인해 행복해지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고요. 그것이 내 인생의 목표가 되어도 손색이 없겠다고요. 나 때문에 내 가족이 행복해지고 나 때문에 내 이웃이 행복해지면 나도 덩달아 행복해질 거 아니에요. 그 이상 뭘 바랄 게 있겠어요.

그런데 지금 선생님은 불행해요. 그 이유는? 바로 여러분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 그래요. 학생은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리면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적어도 하루 일곱 시간은 학교에 있어야 하잖아요. 알고 보면 공부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어요. 자, 책을 펴세요."

▲ 등교하는 아이-아이들의 행복에 민감한 교사가 되고 싶다
ⓒ 안준철
아이들을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 보고 아무런 물정도 모르는 철부지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교사의 입에서 발음되는 언어의 질감을 분별할 줄 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을 긍정하는 것. 아이들의 행복에 민감해지는 것. 작년 한 해 동안 내가 아이들에게 해준 것은 그것뿐이다. 그것이면 족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이 행복해지면 나머지는 스스로 알아서 할 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월간지 <사과나무>에 기고한 글을 조금 깁고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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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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