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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농민회 의장을 지낸 이수금씨는 현장활동과 함께 대규모 논농사와 두릅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전국농민회 의장을 지낸 이수금씨는 현장활동과 함께 대규모 논농사와 두릅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 정종인
'따르릉∼따르릉∼'

조금 이른 시간이었는지 전화 착신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조금 뒤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농민운동가이자 전국농민회(전농) 의장을 지낸 이수금(66) 전 의장은 밥상용 쌀을 첫 반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난 22일 하루종일 우울함을 떨치지 못했다.

이번 주에 그는 경기도 평택 대추리 들녘을 다녀왔다. 평택 대추리 들녘의 논두렁에 피어나는 이름 모를 들꽃에게서 생명의 소중함도 배웠다. 평택 농민들의 애타는 절규를 들으며 녹록지 않은 나이지만 트랙터에 올라 논을 갈았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작은 밀알을 뿌리기 위해….

전국농민회 이수금 전 의장은 나이를 무색케 하는 '현장 활동가'다. 전국단위의 농민시위현장은 물론 지역에서 열리는 농민집회에서도 묵묵히 현장을 지키며 후배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올해로 농민운동 현장활동가로 살아온 지도 30여 년이 다 된다. 지금은 전국농민회 고문과 참여연대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공동대표가 그의 공식 직함이다.

농민운동 현장에서 세 번 울다

'농민운동가' 이수금 전 의장은 농민운동 현장에서 세 번 울었다. 지난 78년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준 해였다. 당시에도 100여 마지기 논농사를 짓던 이 의장은 정부의 권유대로 '노풍'이라는 종자를 파종했으나 목이 나오면서 모두 말라 버려 큰 좌절감을 맛봤다.

이전에도 가톨릭농민회 산재회원으로 활동했지만 왕성한 활동가는 아니었다. 지금은 이름이 가물거리지만 당시 도지사의 현장시찰 때 피해보상을 요구하려 했으나 과잉으로 충성(?)하던 면사무소 직원들에 어디론가 끌려가 격리 수용되는 쓰라림을 맛봤다.

어찌 보면 농민의 진솔한 현장이야기를 차단해 버린 당시 면사무소 직원들의 완력이 이 전 의장을 '농민운동가'로 탈바꿈시켰는지도 모른다

80년대 소 파동, 가슴 아픈 기억

78년 유신독재하에서 농민회 운동을 시작한 이 전 의장은 지난 84년 소 파동 때 가장 많이 울었다고 털어놨다. 자신은 소 사육을 하지 않았지만 150만 원 주고 산 소가 50만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으로 출하될 정도여서 자살을 하는 축산농민들도 속출했다. 그는 당시 소 파동을 '소몰이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시위를 이끌며 농민들의 아픔을 함께 한 그는 그들과 가슴을 맞대고 울었다.

지난 92년 WTO 인준안이 국회를 통과하던 당시에 이 의장은 국회방청석 2층에 둥지를 틀고 역사의 현장을 지켜봤다. 국회인준안을 반대하기로 당론을 정한 야당 의원 가운데 재야운동을 함께 했던 의원이 포함된 3명이 찬성표를 던지는 모습을 보고 본회의장으로 뛰어내리려 했지만 국회경비요원들의 강력한 저지를 받기도 했다,

이수금 전 의장은 전국농민회와 참여연대 고문을 맡고 있다.
이수금 전 의장은 전국농민회와 참여연대 고문을 맡고 있다. ⓒ 정종인

정직을 지키려 살아온 세월

이 전 의장은 지금까지 4번 옥고를 치렀다. 힘든 생활 속에서도 '옥바라지'를 마다하지않은 부인 서옥례(60) 여사와는 지난 68년 결혼의 인연을 맺었다. 전북 정읍시 덕천면 달천리가 고향인 이 전 의장은 이평면 청량리에서 곱게 자란 서 여사를 아내로 맞아 100여 마지기 남부럽지 않은 농사를 지으며 평탄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뤘다. '노풍'이라는 볍씨와 악연(?)이 없었을 때까지는….

이 전 의장의 아들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에서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는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며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장남 정민(37)씨와 서울에서 기자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차남 병희(36)씨는 흙에서 또 다른 인생을 배워가고 있다.

딸 윤정(34)씨는 천안에서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내일을 설계하고 있다. 사위도 농민운동을 하느냐는 질문에 서 여사는 손사래를 쳤다. 서 여사는 "남편이 들으면 서운할지 몰라도 아들이 아픔을 겪을 때가 더 가슴 아팠다"고 털어놨다.

희망이 피어나는 농촌 소망

이 전 의장은 두릅농사를 위해 산에 오르면 먼 산을 바라보며 상념에 젓는 버릇이 생겼다. 세계화 시대에 농산물 수입개방을 물리적으로 막아내는 것은 많은 희생이 따를 뿐 아니라 실정법상 운신의 폭도 적어졌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의 희생을 담보하지 않고 한국의 미래 농업이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의 인식 전환이 시급한데도 농업정책만은 '소걸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밥쌀까지 수입된 마당에 '맛까지 좋다더라'는 여론이 형성되면 우리 농촌은 더 이상 희망이 사라지는데 걱정이 앞서는구먼∼."

'노(老) 농민운동가'의 눈가에는 회한의 눈물이 다시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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