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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선생님 생각이 나서 전화 드렸어요. 잘 지내시지요. 그동안 뭐가 그리 바빴는지 이제야 선생님하고 통화를 하네요."

씩씩하고 밝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2년 전에 충청도로 이사를 한 영미씨(44)다. 점심을 먹고 봄 햇볕이 좋아 공장 뒷마당에 앉아 있는데, 그리움인지 보고픔인지 모를 것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더란다. 그래서 전화를 했다는 영미씨와 점심시간이 끝나도록 긴 통화를 했다. 3년 전에 인연을 맺은 경미씨는 서부고용안정센터에서 취업지원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직업상담원의 소개로 알게 됐다.

어려서 할머니가 '어쩌면 사람 몸이 한 주먹도 안된다냐'라고 하실 때면, '어떻게 사람이 한 주먹도 안 될 수가 있어요'라고 했는데, 영미씨를 본 순간, 그 말이 생각났다. 한 주먹도 안 될 만큼 가냘프고 연둣빛 새순처럼 여린 영미씨는 세상에 근심, 고통, 고달픔이 비켜간 듯, 투명해 보였다. '보이는 모습은 내 삶의 작은 축소판'이라고 했던 말처럼, 영미씨는 그동안 살아온 삶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신청서에 작성된 나이를 본 순간, 깜짝 놀랐다. 앳된 모습과는 달리 불혹을 넘긴 나이였다.

▲ 취업의 염원을 담아 주부구직자가 만들어 준 장미조화
ⓒ 이명숙
"취업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단 한 번도 직장생활을 해 본 적도 없고, 돈을 쓸 줄만 알았지 벌어 본 적도 없어요. 근데 이제는 돈을 벌어야 하거든요. 서부고용안정센터를 갔더니 선생님한테 가면 이력서 쓰는 법도 가르쳐 주고, 면접 보는 법도 알려준다고 해서 왔어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깊디깊은 눈빛 속에 간절함이 들어있었다. 성취프로그램에 참가할 인원선발이 이미 끝나버렸는데도 자리 하나를 더 만들었다. 영미씨는 적극적이다 못해 악착같았다. 마치, 이 시간을 놓쳐버리면 인생이 끝나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혼신을 다해 매달렸다. 영미씨한테 취업이 절박한 이유를 듣게 된 것은 만난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약회사에서 경리업무를 봤던 영미씨의 별명은 엄지 공주였다. 자그맣고 인형처럼 예뻤던 영미씨는 스물두 살에 나이 차이가 꽤 나는 거래처 사장하고 결혼을 했다. 남편은 더 없이 자상했고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았다. 경제적인 풍요, 영미씨밖에 모르는 남편, 무럭무럭 잘 자라주는 아들과 딸.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현실은 안락했고, 풍요로웠다. 결혼해서 살았던 세월들을 돌이켜보면 항상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다. 바이올렛 꽃 잔디 위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는 가족들의 평화로운 모습. 자신의 결혼생활이 그랬다. 그림 같았고 세미클래식 같았다. 불행이 영미씨에게 자리를 내어달라며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요.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온 거예요. 아니죠. 눈치만 있었어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설마,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애써 외면을 했던 부분도 있었죠."

IMF 때도 끄떡없이 버텼던 남편의 사업은 계속적인 경기불황으로 내리막길을 가기 시작했다. 갈수록 적자가 누적되었다. 남편은 그 고통을 집에서는 단 한 번도 내색해 본 적이 없었다. 행여나 영미씨 마음 다칠까봐, 혼자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그 많은 시간을 돈과 씨름하며 살았던 것이다. 은행융자, 사채까지 끌어다 쓴 부채는 결국 집중호우에 무너져버린 둑처럼 일시에 터져 버렸다.

미리 말이라도 해 줬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하는 건데, 단 한 차례 예방접종도 없이 바로 찾아온 경제적인 압박은 영미씨 숨통을 죄여왔다. 20년 가까이 피땀을 흘려 세워놓았던 공장과 땅, 집을 처분하고도 빚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터진 것은 카드빚이었다. 열 개가 넘은 카드로 이리저리 돌려막기를 했던 것이 한계상황에 도달해 버린 것이다.

24평 임대아파트로 옮긴 지 석 달째. 유체동산 경매가 들어왔다. 텔레비전, 오디오, 냉장고, 김치냉장고, 세탁기, 소파, 컴퓨터, 침대, 장롱, 장식장, 화장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압류딱지가 붙었다. 한 가정의 일상이 묻어 있는, 한 가정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돈으로 액수를 매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것들이 구체적인 수치로 드러나자, 허망하고 초라했다.

손바닥 절반보다 더 작은 직사각형의 진분홍색 압류용지. 진달래꽃 색 같기도 하고, 철쭉꽃 색 같기도 한 분홍빛은 방안에도 거실에도 주방에도 버티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켜면 그 속에 있었고, 침대에도, 소파에도, 냉장고에도, 심지어 빨래 속에도 스며들었다. 영미씨는 분홍색만 봐도 경기가 일어날 것 같았다. 철마다 진달래꽃, 철쭉꽃을 보고 싶어 일부러 여행을 하기도 했던 영미씨에게 그 색은 고통이었다. 같은 색을 보고도 상황에 따라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고통을 통해 알았다.

남편을 붙들고 이 지경까지 되도록 왜 나한테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느냐며,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남편은 옆에 없었다. 가정과 일밖에 몰랐던 남편은 너무 멀리 있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방안을 뛰어다녔고, 밥숟가락을 든 채,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가서는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하기 일쑤였고, 휴대전화기도 불통이었다.

현실은 냉혹했고, 다달이 들어가는 세금은 정확했다. 한 가정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거리는데도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세상 속에 둥둥 떠 있는 듯했다. 경매날짜가 다가왔지만 남편은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았다. 영미씨는 일 년 전, 결혼기념일 선물로 받은 중형차를 처분했고 가지고 있는 패물들을 몽땅 팔았다.

경매가 있던 날 아침, 영미씨는 일부러 꽃 단장을 했다. 초라해지기도 비굴해지기도 싫었다. 정확히 오전 열 시.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돌리는데 자꾸만 빗나갔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자, 경매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태연해지기 위해 일부러 숫자를 셌다. 열다섯 명이었다.

"아주머니 혼자세요? 아무도 없어요?"
"저 혼자예요."
"몇 가지 확인하겠습니다. 배우자 지분 신청하시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영미씨는 무조건 그러겠다고 했다. 빚을 진 남편의 아내라는 간단한 확인절차가 끝나자, 압류 물건에 대한 경매가 진행되었다. 경매에 대한 정보가 아무 것도 없었던 영미씨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백만 원부터 시작한 액수가 이백만 원이 되었고 이백삼십만 원에서 더는 올라가지 않았다.

"배우자 우선 매도가 가능한데 하시겠습니까?"

집달관의 질문에 영미씨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자리에서 우선 매도를 하는 게 낫다는 것을 알았다. 이백삼십만 원 중 배우자 지분으로 반을 받았다. 바로 물건을 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날 밤, 경매를 받았던 삼십 대 중반의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남자는 이십만 원만 더 주면, 영미씨에게 다시 팔겠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순진하셔서 세상을 너무 모른다며, 그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해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동차와 패물을 팔아서 남은 돈을 계산해 보니 3개월 정도는 버틸 만했다. 남편은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영미씨는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동안 걱정근심 없이 살아온 것은 순전히 남편 덕이었다. 남편이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은,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찾아온 것이 고용안정센터였다.

▲ 자기소개서-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 이명숙
프로그램이 끝나고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영미씨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고 찾아왔다. 영미씨 얼굴은 까칠했다. 꼬박 삼 일 동안 날밤을 새워가며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 온 것이다.

"세상에, 사흘 동안 잠도 안 자고 쓰신 거예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더는 수정할 것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글자 하나하나에 혼을 담아 쓴 흔적이 역력했다.

"참 잘 쓰셨어요. 더는 고칠 내용이 없어요. 건강해야 직장생활도 할 수 있고, 건강해야 남편에게 기운을 불어 넣어 드릴 수 있잖아요.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주무세요. 아셨죠?"

가냘픈 영미씨가 쓰러져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영미씨가 갈만한 업체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영미씨에게 계속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되지 않았다. 다음날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4일째 되던 날,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취업했어요."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영미씨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잘 썼다는 내 말을 듣고, 그 길로 하남공단 1번 도로부터 업체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행복도 불행도 본인이 선택하는 거라고. 그리고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이겨내는 길을 고민하기보다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을 하라고.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같이 가 달라고 할까 하다 그러면 계속 의지를 하겠더라고요. 그동안 남편에게 의지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찾아가는 방법을 알았으니까, 선생님 말대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자고 생각했어요. 3일째 이력서를 들고 하남공단을 돌았더니, 두 군데에서 채용을 하겠다고 하네요. 선생님 정말 감사드려요.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편이 어려울 때 자신마저 무너져버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남편도 살리고 가정도 지켜야겠다는 그것 하나만 가슴에 새겼다는 영미씨.

열심히 사는 영미씨 모습에 감동을 한 남편도 방황을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왔고, 일 년이 지난 후 충청도에 일자리를 구해 이사를 했다. 충청도에 가서도, 영미씨는 여기서 했던 것처럼 이력서를 들고 직접 업체를 찾아다니던 끝에 취업에 성공했다.

경제 문제가 가정해체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아팠던 내게 영미씨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 지켜주는 가족이 있는 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영미씨와 통화를 끝낸 내 가슴에 스캇펙 박사의 말이 떠오른다.

'한 사람의 위대성의 척도는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이다.'

덧붙이는 글 | 국정브리핑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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