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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경의 집은 화려했다. 상경용천부의 도성 안에서 목단강과 접해 있어 기가 막힌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집은 왕궁과 맞닿아 있는 주작대로와 곧장 이어져 그의 막강한 권세를 보여주기도 했다.

왕신복은 미리 나온 집사를 따라 별채로 안내되었다. 별채라 하지만 웬만한 집 안채만큼 화려하고 웅장했다. 안채는 기와로 지붕을 이었는데, 삼채의 귀면와와 치미에 유약을 발라 달빛에 그 화려함이 더욱 돋보였다. 또한 주춧돌과 기둥이 만나는 부분에는 도자기를 구워서 만든 둥근 체를 돌려 기품이 넘쳐흘렀다. 흡사 궁중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원래 기와는 궁중이나 관청, 절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도록 했지만 양승경은 자신의 집 지붕을 모두 기와로 얹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좌윤 어른."

양승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왕신복을 반겼다. 그는 앞자리에 앉기를 권하며 느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심지가 낮춰진 등잔 불빛이 일렁이는 방안은 사물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봉창으로 새어든 달빛과 파르르 떨고 있는 희미한 등잔 밑으로 만들어낸 긴 그림자는 방안의 분위기를 다소 몽환적으로 만들어 보였다.

양승경은 상투를 넣는 건자(巾子) 위에 복두( 頭)를 쓰고 있었다. 옷은 포(袍)라고 불리는 단령(團領)을 입고 있었는데 당나라의 비단으로 만들었는지 등잔 불빛에 반짝 윤이 났다. 그 밑의 순금제 허리띠는 화려하고 정교해 보였다. 양승경은 귀밑으로 자란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왕신복을 건너다보았다.

"정당성의 일은 좀 어떻습니까?"

"하루종일 문서를 잡고 씨름을 하느라 답답한 일이 많습니다."

"그래도 정당성 좌윤이라 함은 조정 최고의 실력자가 아닙니까?"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좌윤어른 이야말로 황상 폐하의 은총을 한 몸에 받고 계신 분이 아니시오?"

그러면서 주위를 살피다가 옆에 있는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걸 왕신복 쪽으로 밀어놓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한번 풀어보시지요."

왕신복은 잠시 망설이다가 보자기를 풀었다. 천천히 손을 놀리던 그는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 것은…."

양승경이 느물한 미소로 대답했다.
"황금 세 돈과 동백기름입니다."

"이 귀한 것을 왜 저에게 주시는지요?"

"이건 일본에 사절로 갔을 때 천황이 직접 하사한 물품입니다."

"일본 천황이 하사한 것이라면 당연히 가독부(可毒夫: 왕을 말함)에게 올려야 하지 않습니까?"

"가독부에게 드릴 물품은 이미 올렸습니다. 이건 천황이 저 개인에게 준 것입니다."

"이 귀한 것을 특별히 제게 주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천황이 워낙 많은 물품을 주시기에 주위에 좀 나눠주고 싶더군요."

왕신복은 그 말을 곧이 믿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계산하여 움직이는 자였다. 양승경이 누구인가? 보국대장군의 직책으로 발해의 중앙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였다. 그런 그가 정당성의 대내상도 아닌 그 밑의 좌윤을 불러 아주 귀한 황금과 동백기름을 선물로 준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했다. 양승경은 그런 왕신복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모른 척 자신의 말만 해나갔다.

"고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에 후지와라가 우리 발해사절단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더군요. 거기서 내교방의 여악(女樂)과 더불어 무려 20명이 넘는 무희들이 우리 사신을 극진히 접대했습니다. 거기다 황금과 동백기름뿐만 아니라 솜 1만 둔까지 제게 선물로 건네더군요."

당시 일본의 후지와라나카마로 집은 거대한 주춧돌을 사용하여 지었고, 화려한 연화문이 새겨진 기와막새로 지붕을 이었다. 이는 천황이 머물던 궁궐에서만 사용하던 문양으로, 개인의 집에서는 감히 쓸 수 없었던 막새다. 그만큼 일본에서 후지와라의 권세는 막강했다. 심지어 그의 집은 천황의 처소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어린 쥰닝 천황은 후지와라를 아버지로 불렀고, 그는 일본 조정의 병권을 쥐고, 내외제 병사를 장악하여 흔들 만큼 최고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권세를 자랑하는 후지와라나카마로라고는 하지만 조신(朝臣)의 신분으로 자택에 발해사절을 초대했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거기다 천황으로부터 규정된 신물 외에 물품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지와라가 양승경에서 준 솜의 양 1만 둔은 정해진 산물의 양이 3백 둔이라는 것에 비하면 실로 30배가 넘은 양이었다.

그만큼 후지와라는 양승경을 극진히 환대하며 깍듯이 대접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왕신복은 굳이 자신의 집으로까지 불러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저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왕신복은 가늘게 미소를 만들어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수많은 의문이 갈래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한참동안 일본에서 접대 받은 연회 이야기를 하다가 양승경이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좌윤께서는 우리 가독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신복은 그 말의 뜻을 몰라 턱을 앞으로 내밀 뿐 대꾸하지를 못했다. 양승경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길게 자란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눈은 형형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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