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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와 싸워야 할 세 가지 이유와 한 가지 의무가 있는 사람이네. 물론 자네 역시 사정을 알고 나면 노납과 반드시 싸워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걸세."

광와라는 노인은 말의 내용과는 달리 부처의 미소를 닮은 듯한 자애스런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그러자 후송이라는 선풍도골의 노인 역시 말을 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노도도 마찬가지네. 다만 자네와 싸워야 할 이유가 세 가지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이유는 약간 다르지. 또한 한 가지 의무는 없다고 할 수 있네. 물론 자네가 굳이 따져 든다면 같겠지만 말이네."

두 노인들은 심상치 않은 내력을 가진 노인들이 분명했다. 단지 그들의 신분이나 내력, 고강한 무공 정도가 아니라 자신과 필시 밀접한 관계가 있는 노인들이란 느낌이었다. 아니 자신의 부친과 분명 관계가 있을 터였다. 옷매무새가 가사나 도복과 얼핏 비슷하기는 하나 정식으로 불문(佛門)이나 도가(道家)에 몸담고 있는 인물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노납이나 노도라 지칭하는 것을 보면 과거에 불문이나 도가에 몸을 담았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노인장들은 소생을 아시오?"

"물론 노납은 자네를 매우 잘 안다네. 이름은 담천의. 금릉에서 태어났으나 고향은 소주. 나이는 스물여섯. 자네의 부친은 과거 주원장의 주구로 균대위의 수장이었던 담명이란 장군.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광와노인이 잠시 말을 끊고 뜸을 들이자 후송노인이 끼어들었다.

"더 있지. 부친의 이끌던 균대위를 흉내라도 내려는 듯 보잘것없는 쓰레기들을 모아 초혼령주라 떠들고 다니고, 천마곡에 갇혀버린 제마척사맹인가 하는 되도 않는 오합지졸의 맹주로 내정되어 있다지? 게다가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고 천방지축 날뛰는 망아지가 아닌가?"

두 노인은 장난치듯이 말하고는 있었지만 결코 장난이라고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를 굳이 엄숙하게, 혹은 딱딱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담천의는 검미를 꿈틀거리며 말을 툭 던졌다.

"두 분은 소생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구려. 그렇다면 이제 두 분이 누구신지 가르쳐 주실 수 있겠소?"

"허… 너무 조급히 묻지는 말게나. 노납이 자네와 싸워야 할 이유 세 가지를 듣고 나면 자네의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네."

"그럼… 물론이지. 아마 그 사실을 알고 나면 노도가 싸우지 않으려 해도 먼저 싸우자고 할 것이지."

광와라는 노인의 말에 후송이라는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소생은 노인장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이유에 대해 귀를 씻고 경청하겠소."

"확실히 젊은 사람이라 재촉이 심하군. 좋으이.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기로 하세. 노납은 두 지기(知己)와 함께 천동 오룡기(五龍旗) 중 금룡기(金龍旗)의 기주(旗主)라네."

"천동의 금룡기주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다시 한번 담천의는 포권을 취했다. 이미 자신의 이름이야 광와노인이 알고 있으니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다.

"아주 예의바른 사람이군. 그런 점은 확실히 고지식한 자네 부친을 닮은 것 같으이… 하여간 자네와 싸워야 할 첫 번째 이유는 노납이 금룡기주인 만큼 능히 짐작하고 있으리라 믿네. 노납으로서는 이곳에 들어 온 외인을 그대로 내보내지는 않을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있고, 그렇다고 노납이 보기에 자네는 순순히 포박을 받지 않을 테니 말일세."

"옳으신 말씀이오. 노인장."

"두 번째 이유는 자네가 죽인 사람들이 노납과 너무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야 하는 것이 노납이 해야 할 막중한 책무라 할 수 있지. 물론 노납이 금룡기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자네는 이곳에 들어와 노납의 동료를 셋씩이나 죽였고, 또한 천동의 사자(使者) 세 명을 죽였네."

금색면구를 쓴 세 명의 인물과 상엽 형제를 죽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상엽 형제들은 아마 천동의 사자였던 모양이었다. 그 말을 하는 동안 주위에 서있던 금색면구를 쓴 이십여 명의 인물들의 눈에서 살광(殺光)이 번뜩였다. 갑자기 넓은 지하광장이 질식할 것 같은 살기에 뒤덮였다. 만약 두 노인이 담천의와 대화하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손을 썼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금룡기를 이끄는 노납의 두 지우(知友) 중 한 사람이 자네 손에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네. 그 연유로 노납은 자네를 반드시 만나보고자 했다네."

"……?"

담천의의 얼굴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떠오르자 광와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생사판관(生死判官) 표공도(表孔道)를 아는가?"

그제 서야 담천의는 고개를 끄떡였다. 여음곡 산등성이에서 바둑판을 놓고 담천의의 발길을 막았던 노인. 내기로 상대의 생사를 결정짓는 괴벽이 있었던 기인이다.

"표노인이 친구 분이라면 노인장의 말씀이 맞소."

"노납에게 남은 친구라곤 그 친구와 여기 있는 후송 밖에 없었다네. 비록 두 친구보다 손에 피를 더 많이 묻힌 관계로 노납이 기주를 맡고 있지만… 아… 노납은 극락에 가긴 틀렸네… 아마 판관 그 친구는 극락에 갔을지 모르겠군."

광와노인은 갑자기 말을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생사판관의 죽음이 떠오르자 정신이 산만해진 것일까?

"아… 노납도 극락에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노납은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안 될 거야. 그러고 보니 자네도 손에 피를 많이 묻혀 극락에 가긴 틀렸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누구나 그런 변명을 하지.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손을 썼다'라던가,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악인이었으니 할 수 없었다'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런 상황을 만든 게 누군가? 바로 자네 자신 아니었나? 결국 모든 죽음이란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반드시 의도된 것이었단 말일세."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이런 쓸모없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에 극락을 가고 안가고가 무슨 상관이 있느냔 말이다. 나이 먹은 노인네는 잔소리만 는다더니 바로 그 짝이었다. 담천의는 내심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찔리는 데가 없지는 않았다. 표공도의 죽음과 추혼귀견수 하공량의 죽음을 보면서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느꼈던 적이 있었고, 전월헌과의 승부 후에 그는 지독한 자기연민에 빠져 든 적이 있지 않았던가?

"소생은 극락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소."

"그것은 말일세. 자네가 아직 젊기 때문에 하는 소리네. 노납과 같이 나이를 먹게 되면 너무나 두려워진다네. 죽은 뒤에 팔열지옥(八熱地獄)에 빠지면 어떡하나…? 팔한지옥(八寒地獄)은 괜찮고…? 아마 한시도 참지 못하게 될 걸세. 으… 정말 끔찍한 일이야… 끔찍한 일이고말고…."

광와노인은 정말 팔열지옥에 빠져 있는 듯 몸서리쳤다. 멀쩡하게 말을 하다말고 저런 모습을 보이자 담천의는 저 노인이 정말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노인장…!"

"아마 노납이나 자네는 죽으면 반드시 초열지옥(焦熱地獄)에 빠지게 될 걸세."

초열지옥(焦熱地獄)은 살생(殺生), 투도(偸盜), 음행(淫行), 망어(妄語) 등의 죄를 지은 자가 가게 된다는 지옥이다.

"소생은 죽은 뒤에 불에 달군 철판 위에 놓여지던,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지져지던 상관이 없소. 소생은 지금 노인장의 세 번째 이유를 듣고 싶을 뿐이오."

"그렇군… 맞아… 그 말을 하다가 또 다른 데로 흘렀군.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정신이 없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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