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80년대부터 꾸준히 '민족문학 담론'에 천착해 온 문학평론가 류보선(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씨가 최근 <한국 근대문학과 민족-국가 담론>을 통해 발표한 '민족≠국가라는 상황과 한국 근대문학의 정치적 (무)의식'이란 제하의 평론은 한국 근대문학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

비단 문학평론계에서 한국 근대문학을 재조명하고 가능성을 타진해 온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번 평론에 제시된 '민족≠국가'라는 도식에 함축된 의미는 확실히 기존 담론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저자가 자인한 것처럼 기존 담론과 중첩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기존 담론의 연장선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한국 문학평론계에서 민족 담론의 열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시기는 1970~80년대였다. 백가쟁명식의 다양한 민족 담론이 명멸하는 가운데 이 시기에 가장 성공적으로 입지를 굳힌 입론으로는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을 꼽을 수 있다. 그의 근저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에서도 재확인되는 '민족문학론'이란 한마디로 통일을 지향하는 문학이다. 한국 근대문학이 가지는 태생적 한계를 궁극적으로 남북한 통일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민족문학론을 비롯한 제(諸)담론이 출발 단계에서부터 한국 근대문학의 불완전한 토대를 극복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민족, 국가에 관한 담론은 필연적으로 민족, 국가의 과도한 이념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고, 아울러 그에 대한 반동으로 민족, 국가에 대한 과도한 비판과 부정이 수반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다루고 있는 류보선의 평론은 과도한 긍정과 부정의 다음 단계, 즉 변증법의 단계로 접어든 담론의 양상을 띠고 있다.

'민족≠국가 혹은 민족 = 국가'

논의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선 '민족≠국가'와 '민족=국가'란 도식의 차이점을 먼저 주지할 필요가 있다.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으로 대변되는 기존의 민족 담론이) 주로 민족 = 국가란 환상체계의 필요성, 의미, 가치 혹은 진정한 민족=국가의 건설 방안 같은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그리고 민족=국가에 대한 의미 있는 병존 형식이 개인이나 사회, 그리고 한 국가나 세계 전반에 큰 발전의 계기가 되리라는 전제에 서 있다면, 최근의 민족 담론에 대한 관심은 예전의 그것과 전제부터 다르다. 최근의 민족 담론은 민족(혹은 국가)이라는 제도와 관념이 사실은 고유하고 활력 넘치는 다양한 가치들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괴물일 뿐이라는 출발점에 서 있다." - 본문 중에서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국가'란 도식은 주로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역사를 극복하려는 시도와 연관되어 있다.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은 '민족=국가'를 토대로 해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지향함으로써 획득된 입론인 셈이다.

그에 반해 '민족≠국가'란 도식은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의 시, 공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좀 더 객관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근대 이후 한국 근대문학을 발생시킨 조건은 민족≠국가라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근대 이후 한국문학을 움직인 동력 역시 바로 민족≠국가라는 조건이다. 이곳이 근대 이후 한국문학이 그 다양하기 짝이 없는 수많은 흐름들을 피어 올린 바로 그 자리이다." - 본문 중에서

"우리는 이제 근대 이후 한국문학을 보는 시선을 바꿔야 하는 단계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즉 근대 이후 한국문학의 조건이 민족≠국가의 상황이므로 생리적으로 민족=국가라는 인식을 가졌을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 대신 민족≠국가의 상황은 필연적으로 민족=국가의 문학을 만들어내지 않으며 오히려 민족=국가에는 전혀 무관한 기획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전제에 설 필요가 있다." - 본문 중에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민족≠국가'란 도식은 일제 식민통치와 분단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에서 우리 민족이 스스로 온전한 국가를 이루지 못했던 현실적 배경을 함의한다. 아울러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극복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객관적 연구의 대상으로 설정할 단계에 도달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결과 친일파의 자기 합리화가 초래될 가능성을 우려할 필요는 없다. 본문에서도 이광수의 사례가 주요하게 언급되고 있지만, 자기 합리화의 여지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친일의 원인을 심도 있게 추궁한다.

이광수의 친일

우리는 막연히 이광수가 일제 식민통치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민족주의에서 친일로 이행했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본문에 의거하면 이광수가 친일파가 된 궁극적 계기는 우리 민족 스스로 국가를 형성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과 그로 인한 좌절감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광수가 민족 공동체의 발전을 전적으로 도외시했다고 볼 순 없다. '여의 작가적 태도'란 글에서 "조선과 조선민족을 위하는 봉사-의무의 이행"과 "조선과 조선민족의 지위의 향상과 행복의 증진에 호미(毫未)만큼이라도 기여함"을 자기에게 부과된 막중한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 스스로 국가를 형성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의 결과는 참혹했다. 민족애는 민족에 대한 부채와도 같은 책임의식과 사명감으로 전락해 버렸고, 아무런 확신 없이 개인과 민족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고가다 그는 결국 자학적인 사관(史觀)에 심신이 부식된다.

급기야 다음과 같은 반민족적인 망언을 객혈처럼 토해냄으로써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얼룩을 남긴다.

"황국정신의 일본문화는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문화입니다. 일군만민(一君萬民), 충효일치의 이 정신이야말로 만국만민이 다 배워야 할 정신입니다. 이 정신은 구미의 개인주의적 인생관과는 정히 대척적인 것이어서, 이상의 본체이신 일군을 위하여서 살고 일하고 죽기를 인생의 본분으로 아는 일본정신과 자기 일 개인의 이해고락을 표준으로 하는 구미정신 간에는 그 윤리적 가치에 있어서 소양(宵壤)의 현격이 있습니다. 지상에 평화의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는 정신이 어느 것인 것은 일목요연할 것입니다. … 묵은 조선인으로 죽어서 일본국민으로 재생하는 것입니다. … 일본국민으로 재생한 표(標)는 폐하께 저를 바치는 심정입니다. 내 집과 재산과 처자와 내 생명이 모두 폐하의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니 이 속에 생활의 근저와 중심이 확립한 기쁨이 용출하는 것입니다. … 이상 말한 바와 같이 낡은 조선인으로 죽어서 황민으로 재생하고 '저'로 죽어서 '우리'로 부활한 사람이라야 신시대를 담당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이광수, '인생과 수도' 중에서

이광수를 통해 우리는 민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상실한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 민족 스스로 국가를 형성할 수 없는 현실이 얼마나 무섭고 절망적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앞엔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아직 '민족 =국가'를 완결 짓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민족이 남북으로 찢어져 두 개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으니 우리 처지도 이광수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남북한이 분단의 사슬에 발목이 잡혀 있는 한 우리는 이광수가 토해낸 한 줌의 객혈을 끊임없이 반추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한국 근대문학과 민족-국가 담론>, 소명출판, 2005


한국 근대문학과 민족-국가 담론 자료집

신두원.한형구 외 엮음, 소명출판(201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