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이기원
찬 바람 쐬고 돌아와 급히 먹은 점심이 얹혔는지 속이 '빠지지' 하고 아픕니다. 그래서 소화제 없느냐고 물었더니 아내가 정로환을 꺼내주며 먹어보라고 합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는 배 아프다고 특별히 약을 먹어본 적은 없습니다. 심하게 아프면 바늘로 손가락을 따거나, 읍내에 사는 친척에게 구했다며 소다 한 숟가락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 뒤 형편이 나아지면서 알약 소화제를 먹을 때도 있었고 냄새 고약한 정로환을 먹기도 했습니다. 이젠 간단한 상비약 정도는 집에 두고 살 정도는 되었는데 소화제로 아내가 구해 둔 게 정로환입니다. 그런데 정로환에는 간단치 않은 역사적 유래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1904년에 시작된 러일전쟁은 이듬해까지 한반도와 만주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이 전쟁을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다. 먼저,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한 뒤 은행가들이 미국이나 영국 기업을 방문해 당시 별 가치도 없던 일본 국채를 파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또 의학계는 주요 전장이 될 만주의 추위와 열악한 물 사정으로 생길 소화기 질환에 대비하여 신약을 개발했는데, 우리에게도 친숙한 정로환이 바로 그 약이다. 원래 정로환은 러시아를 정벌한다는 뜻이라는 설도 있다. - 이서규, <사진으로 본 일제시대의 잔영> 중에서


이 설에 의하면 정로환(正露丸)의 원래 이름은 정로환(征露丸)이라는 것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각축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시아에서는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에 대해 환상과 선망의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중국 신해혁명의 아버지 쑨원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한 결과, 아시아 민족이 독립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품기에 이르렀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네루도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였고, 심지어 안중근 조차 ‘드디어 동양 중에서 서양을 따라잡은 나라가 나왔구나!’라며 일본의 승리를 감격스러워하였다. -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중에서

역사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살아 숨쉬는 게 역사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면 그만인 약 이름이지만, 유래를 알고 나면 섬뜩한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향한 환상과 선망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재생산되고 있는지 곰곰 생각해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