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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4절기의 첫째 절기인 입춘이 바로 내일입니다. 바야흐로 계절은 봄이라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꼬물꼬물 기어들던 봄이 심술궂은 동장군에게 덜미를 잡혔습니다. 쨍한 칼바람 앞에 햇살 따스한 봄이 더 절실해집니다.

아침. 머리를 감겨 딸아이를 욕실에서 데리고 나오니 덜덜덜 떨어댑니다. 한겨울 내 아침마다 달랑 팬티 하나만 입고 머리를 감았어도 춥다 소리 한마디 않더니 오늘 같은 반짝 추위가 오히려 더 적응이 안 되나 봅니다.

"할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추운데 옷 단단히 입었지?"
"네."

"복희야. 오늘 할아버지 치과 가는 날인데 어린이집 다녀와서 같이 갈래?"
"치과요? 그럼 저번에 한 약속 지키실 거예요?"
"그래. 약속 지키마."

딸아이에게 그 약속에 대해 물어 보았지만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비밀이라는 말에 다소 궁금증이 일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아이의 비밀이라고 엄마라는 권위를 휘둘러 비밀을 캐내선 안 되겠다는 난데없는 너그러움이 발동해서였습니다.

어린이집 차에 딸아이를 태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밤톨만한 것이 비밀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기나 알까 싶었습니다. 그래봐야 무엇이 갖고 싶은데 제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할 것이 뻔했기에 할아버지께 사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또 제게 물어보고 사준다고 했을 것입니다. 어차피 들통 날 비밀. 그래도 딸아이는 비밀이라서 말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딸아이의 천진스러움에 실성한 사람마냥 헤픈 웃음이 주책을 부립니다.

지난주 금요일(27일) 오후였습니다. 아버지의 정기검진을 위해 딸아이와 함께 집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현관문을 잠그다 말고 집으로 다시 들어가고 잠그다 말고 또 다시 들어가야 했습니다.

'가스 밸브는 잠갔나? 욕실 불은 껐나? 베란다 창문은 잠갔나?' 스스로 묻다 결국 집으로 들어가 확인을 해야 했습니다. 건망증이 심해진 탓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고 나서야 집을 나섰습니다.

ⓒ 김정혜
아버지와 딸아이가 이미 동네어귀를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할아버지와 손녀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참 정다워 보였습니다. 시골마을의 고요한 오후 속을 두 손 맞잡고 걸어가는 아버지와 딸아이. 뒤에서 바라보자니 그리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 김정혜
평화로움은 이어 제 가슴을 행복으로 젖어 들게 했습니다.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습니다. 아버지와 딸아이의 다정한 뒷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좀더 길게 행복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느린 발자국에 행복은 종종걸음입니다. 딸아이의 어서 오라는 분주한 손짓도 애써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 김정혜
딸아이가 아버지께 무슨 이야기를 하는 듯했습니다. 이어 아버지가 딸아이에게 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딸아이가 잡고 있던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토라진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딸아이의 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딸아이가 또 뿌리쳤습니다. 딸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만 내려다보며 걷고 있었습니다. 삐쳐도 단단히 삐친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너털웃음이 겨울 오후 속으로 섞여 들고 있었습니다.

ⓒ 김정혜
뒤에서 보고 있자니 그리 재미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딸아이는 아버지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걷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아버지와 딸아이는 큰 길을 사이에 두고 이 쪽 저 쪽으로 나뉘어지고 말았습니다. 트럭 한 대가 아버지와 딸아이가 갈라놓은 휑한 길로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습니다. 마치 아버지와 딸아이 사이에 일고 있는 싸늘한 바람처럼.

하지만 아버지와 딸아이의 냉전은 트럭 한 대가 지나간 아주 잠깐 사이 끝이 난 것 같았습니다. 딸아이가 슬금슬금 아버지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또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떤 합의가 이루어진 듯했습니다.

ⓒ 김정혜
딸아이가 다시 아버지의 손을 맞잡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딸아이의 뒷모습은 다시 다정해 보였습니다. 뒤따르는 저로서는 아버지와 딸아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어떤 합의에 도달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도 딸아이에게도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의 일이니 그냥 모른 체 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애미야. 오늘 오후에 치과 갔다 올 때 복희에게 뭐 하나 사줘야겠다."
"뭐요?"

"거 뭐라더라. 아바타 수첩이라던가. 저번에 병원 갈 때 사달라는 거 에미한테 물어 보고 다음번 치과 갈 때 사준다고 했거든."
"아바타 수첩요? 그러세요."

점심을 드시며 아버지는 딸아이와의 비밀을 그렇게 털어 놓으셨습니다. 아바타 수첩이라면 벌써 서너 개쯤 딸아이에게 사준 기억이 납니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그림들의 스티커가 수첩처럼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워낙에 스티커 붙이기를 좋아하는 딸아이는 온 집안 구석구석에 그 스티커 인형들을 붙여 놓았습니다. 아마도 딸아이는 그 아바타 수첩을 또 사달라고 하면 제가 나무랄 줄 알고 할아버지께 부탁한 모양입니다.

꽤 쌀쌀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외출준비에 분주하십니다. 딸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바로 나가자 성화십니다. 손녀가 당신께 뭘 사달라고 조르는 게 아버지는 너무 좋다 하십니다. 한 개가 아니라 열 개라도 사주고 싶다 하십니다. 그러나 애 버릇 나빠진다며 염려를 해대는 이 딸자식이 그 기쁨을 가로 막고 있으니 한편 야속하다고 하십니다.

사달라고 졸라댔을 딸아이와 사주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셨을 아버지. 엄마에게 물어보고 다음번에 꼭 사준다는 할아버지의 약속에 토라지며 손을 뿌리치던 딸아이의 삐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마도 오늘 나들이는 딸아이에게나 아버지에게나 신나는 나들이가 될 것 같습니다. 하여 멀찌감치 떨어져 길 양쪽으로 헤어져 걷는 일이 오늘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딸아이가 두 손 꼭 잡고 걷는 뒷모습을 오늘도 느린 걸음으로 지켜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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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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