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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나라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한국과 가장 밀접한 나라다. 그만큼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 혹은 정서도 한마디로 단언하기 힘들 만큼 매우 복잡한 구도를 띠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이 '중국'이라는 말을 듣고 떠올리는 이미지는 문화적 콤플렉스, 경계심, 멸시, 모멸감, 극복의식, 막연한 연대의식, 적대감, 무시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들을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은 일종의 콤플렉스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콤플렉스가 더 많다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해 느끼는 기본적인 감정이 일종의 콤플렉스 같은 것"이라는 표현에 대해 일부 한국인들이 분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해 우월감보다는 콤플렉스를 더 많이 갖고 있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반드시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보다도 더 부끄러운 것은, 상대방에 대해 이유 없는 우월감을 느끼거나 혹은 자신의 단점을 의식적으로 숨기려 하는 것이다.

또 어떻게 보면, 콤플렉스는 자기 발전의 심리적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못하다는 심리적 자각은 자신의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적당한 스트레스가 건강에 도움이 되듯이, 적당한 콤플렉스 역시 개인이나 민족의 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솔직히 분석하고 우리의 단점을 하나씩 제거해 나감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강하게 하는 것이 민족적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외국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우리 혼자만 막연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면, 공연히 우리의 모양새만 초라해질 뿐이다. 아무튼 우리의 심층 의식을 솔직히 분석하는 작업은 분명 우리를 발전시키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럼, 위와 같이 복잡한 대(對)중국 감정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한국인의 대중국 의식 속에는, 일종의 콤플렉스(편의상 '상위 정서'로 약칭)를 기조로 문화적 콤플렉스, 경계심, 멸시, 모멸감, 극복의식, 막연한 연대의식, 적대감, 무시 등(편의상 '하위 정서'로 약칭)이 복합적으로 뒤엉켜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인들이 의식 저변에서는 중국에 대해 콤플렉스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멸시'나 '무시' 같은 정반대의 감정도 갖고 있다는 점에 흥미를 가질 수 있다. 이처럼 상위 정서와 하위 정서가 상호 복합적 구도로 엉켜 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대중국 감정 역시 일률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것이다. 그럼, '상위 정서'와 '하위 정서'가 각각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고구려 멸망 이후 수세적 처지에 놓여

중국에 대한 콤플렉스를 내용으로 하는 '상위 정서'는,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 오랫동안 한반도가 중국 왕조 앞에서 수세적 입장에 놓였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제1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족 간의 콤플렉스 구조가 역전되려면 (1)역사적 의미를 갖는 중대한 접촉 과정에서 (2)대립하는 쌍방이 (3)정반대의 운명에 처하게 되어야 하는데, 고구려 멸망 이후로는 한반도와 중국이 실질적으로 충돌한 적이 별로 없다.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당 태종의 유조(유언)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 중국은 한반도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가급적 충돌을 회피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그래서 그 이후 한반도는 중국의 한족 왕조와 비교적 평화적인 관계를 누린 동시에, 콤플렉스 구조를 뒤엎을 만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과정에서 한·중 양국이 동일한 운명에 놓임에 따라 한국과 중국이 적대관계가 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과거의 콤플렉스 구조가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상위 정서'에서는 별로 변한 게 없지만, 그에 비해 '하위 정서'는 많은 역사적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변모를 보여 주었다.

중국에 대한 '하위 정서' 가운데에 문화적 콤플렉스와 경계심은 이미 오래 전부터 형성된 것이다. 당연한 언급이 되겠지만, 문화적 콤플렉스는 한반도와 중국의 문화교류 과정에서 한반도가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게 더 많았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이며, 경계심은 고조선·고구려 이래의 오랜 대립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한족'과 '여진족' 이미지 뒤엉켜

그런데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은 17세기 초반에 이르러 획기적인 변화를 겪는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 왕조의 지원을 받고 책봉까지 받았던 여진족이, 임진왜란으로 조선 및 명나라가 약화된 틈을 타서 급격히 부흥하였다. 여진족은 정묘호란·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1644년에는 한족을 물리치고 중원의 패자(覇者)로까지 뛰어올랐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서에도 큰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전 시기만 해도, '오랑캐' 여진족에 대해 조선인들은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러한 우월감은 멸시라는 태도로 표출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 때에 그 여진족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여진족에 대한 조선인들의 감정은 '우월감+모멸감'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진족이 한족 왕조인 명나라마저 몰아내고 정통 중국왕조가 되자, 이번에는 중국에 대한 조선인들의 정서에까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만주족으로 개칭한 여진족이 중국 주류사회로 편입됨에 따라, 여진족에 대한 감정과 중국에 대한 감정이 혼합하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서는 '한족'과 '여진족'의 이미지가 뒤엉켜 새로운 '중국인'의 이미지가 생성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계기로, 멸시나 모멸감 같은 새로운 정서가 조선인들의 대중국 감정에 뒤섞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인들이 의식 한 쪽에서는 중국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끼면서도 다른 한 쪽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멸시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17세기 이래의 역사적 경험에서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양반 지식인들이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갖게 된 것 역시 '여진족이 지배하는 중국'에 대한 멸시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때에 새롭게 등장한 대중국 의식은 19세기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런데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인들의 대중국 의식에는 '극복의식'이라는 새로운 양상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극복의식'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 인물이 바로 김옥균이라 할 수 있다. 그 점에 관하여는 제3편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제3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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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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