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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땅에 마지막으로 남은 제주초가의 흔적이다.
내 고향 땅에 마지막으로 남은 제주초가의 흔적이다. ⓒ 김동식
고향마을은 설날이지만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적막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고향을 찾는 이웃들도 같은 심정일까. 그 이웃들도 오늘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친지가 따로 없이 서로 떡반을 나누던 정겨운 마을이 비라도 내릴 듯 잔뜩 찌푸려 있다. 담장 너머로 동백꽃이 먼저 마중 나와 있다. 정겨운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고향의 옛 모습은 칠촌종숙의 초가대문(이문간)에 걸려 있다. 내 고향 땅에 마지막으로 남은 제주초가의 흔적이다.

짐을 풀 곳은 사촌형님 댁이다. 아흔을 바라보는 홀어머니를 모시며 고향에 남아 있는 고집센 농투산이다. 명절을 먹으면 환갑이라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나이를 먹어봐야 어른 대접을 받을 때가 아니란다. 아직도 산골동네에서는 이 나이로 막내 딱지를 뗄 수 없다. 세월이 흘러도 항상 막차를 탄 인생이 돼 버렸다. 내 고향이 점점 늙어가고 있는 중이다. 여느 농촌이나 다를 바 없이 '독우영동네'도 겪어야 하는 고령화 현실이다.

고향집의 혼을 지키는 고목나무

옛추억을 따라 가는 올래는 예전 그대로다.
옛추억을 따라 가는 올래는 예전 그대로다. ⓒ 김동식
짐을 내려놓고 슬그머니 마당을 빠져 나왔다. 18년을 살았던 곳으로 가보기 위해서다. 지난 가을 추석 때와 마찬가지로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올래(집 안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예전 그대로다.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발바닥의 감촉이 제법이던 올래다.

끈끈한 나눔과 베푸는 것으로 늘 행복했던 운명공동체, 이제는 가고 없다.
끈끈한 나눔과 베푸는 것으로 늘 행복했던 운명공동체, 이제는 가고 없다. ⓒ 김동식
올래를 같이 쓰던 이웃집은 먼 친척 할머니가 생전에 살던 집이다. 할머니랑 같이 살던 손자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기 전까지는 소담스런 초가였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어려울 때나 즐거울 때 든든한 길벗이 됐던 할머니요, 손자였다. 이웃과 이웃이 만나 끈끈한 나눔과 베푸는 것으로 늘 행복했던 운명공동체들이다. 사망위로금을 받아 초가를 허물고 새 단장한 슬레이트 집도 이제는 주인이 없다.

고향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영혼의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고향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영혼의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 김동식
고향집은 올래가 끝나는 곳부터다. 그러나 10여 년 전 고향집은 사라지고 없다. 안거리(안채)도, 밖거리(바깥채)도, 우영팟(텃밭)도 없다. 그 자리에는 모두 밭이 돼 버렸다. 식용작물인 조를 가을걷이한 흔적이 또렷하다. 이곳에 살던 18년간의 기억세포가 송곳처럼 타다 남은 그루터기에 깊게 박힌다. 어쩔 수 없다. 이미 흙이 되고, 바람이 되고, 공기가 된 어머니, 아버지의 영혼이 가슴에 박히고 있는 그루터기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고향집 빈 자리에는 팽나무가 운명처럼 서 있다.
고향집 빈 자리에는 팽나무가 운명처럼 서 있다. ⓒ 김동식
사라진 고향집 터에는 팽나무가 한 그루 있다. 100년이 훨씬 넘는 고목이다. 시달림도 많이 받았다. 10미터를 뻗어 나가다가 바깥채를 덮어버린다고 한 자 굵기의 굵은 나뭇가지가 잘려나가기도 했다. 또 칠촌당숙 우영팟으로 뻗고 있다고 잘리고, 올래를 모두 덮어 농작물을 실은 수레가 못 지나가게 됐다고 또 잘렸다. 바람 잘 날이 없던 나무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나무에 손대는 사람도 없었다. 비명만 지르며 고향집을 지켜오던 팽나무도 이제는 텅 빈 밭을 감시해야 하는 운명 탓인지 영 기운이 없어 보인다. 우리 집과 애환을 같이 해 온 팽나무라 그래도 대견스럽긴 하다. 초가 두 채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간 데 없는 고향집의 빈자리를 가늠해 주는 징표 노릇만이라도 어딘가.

가난해서 행복하고, 가난해서 더욱 질긴 삶

새마을운동의 광풍에 못이겨 통시 옆에다 지은 재래식 화장실이 유물처럼 남아 있다.
새마을운동의 광풍에 못이겨 통시 옆에다 지은 재래식 화장실이 유물처럼 남아 있다. ⓒ 김동식
또 하나 상징처럼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새마을운동의 뒤늦은 강요에 못이겨 통시(제주의 전통화장실 겸 돼지우리) 옆에다 만든 재래식 화장실이다. 통시는 통시대로, 재래식 화장실은 화장실대로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난 때문이다. 돼지를 키우고, 소를 키우고, 통시거름을 사용해 밭농사를 지으려면 박정희 정권이 싫어했던 통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됐다.

울담과 축담에 절반은 파묻혀 있지만 25년 전 지을 때 모습 그대로다. 문짝은 떨어져 나갔지만 우여곡절을 겪은 우리 집 신식 변소다. 초가지붕도 개량하라고 성화였지만 길가에서 보이지 않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대로 버텼다. 행정기관보다 가난이 더 무서웠던 것이다.

고향집 뒷밭에는 가난의 이름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묻혀 있다.
고향집 뒷밭에는 가난의 이름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묻혀 있다. ⓒ 김동식
고향집 뒷밭에는 아버지가 묻혀 있다. 조상 땅을 물려받아 한 평생을 흙을 일구다 다시 흙으로 돌아간 것이다. 지독한 가난을 헤쳐 나가는 길에 한 세월 동행했던 어머니가 먼저 가신 다음이다. 그 분들이 가시면서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려 준 건 역시 가난이었다.

그 가난은 특별한 것이었다. 가난해서 행복하고, 가난해서 더 모진 삶을 살도록 부모는 늘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 있다. 그 분들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을 관리하는 몫은 우리들이다.

설을 쇠고 고향을 떠나오는 동안 벼랑 끝에 몰린 우리 농촌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자생력을 잃고 있는 이 시대 농촌이 우리 도시가 상속받아야 할 유산이 되고 있는건 아닌지 발걸음을 자꾸 멈추게 했다.

우리 시대 농촌이 도시가 상속받아야 할 유산이 아닌지 마음에 걸린다.
우리 시대 농촌이 도시가 상속받아야 할 유산이 아닌지 마음에 걸린다. ⓒ 김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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