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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한 학부형에게서 반가운 전화가 왔습니다.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결국은 자퇴원을 낸 아이가 친구의 설득으로 학교를 다니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친구를 설득해준 그 아이도 한 때는 저를 많이 힘들게 했던 아이였지요. 학부형과 전화를 끊고 그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너, 오늘 예쁜 짓 했다며?"
"그래서 애들한테 그랬어요. 선생님께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자고요."
"당연히 사주어야지. 설 쇠고 한 번 만나자."
"예, 선생님. 제가 연락드릴게요. 참 선생님, 설 잘 쇠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 고맙다.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전화를 끊고 나니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먹구름 속에서 솟아오른 찬란한 해를 바라보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담임을 맡은 서른다섯 명의 아이들을 다 진급시킬 수 있겠구나 싶어 뿌듯한 마음에 세상을 다 얻은 듯했습니다. 힘든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로 인해 저 또한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네 자신에 대해서 자랑스럽니?"

그러다가 잠깐 잠이 들었나 봅니다. 눈을 떠보니 자정이 넘어 있었습니다. 다시 잠을 청할까 하다가 거실로 나와 TV를 켜니 화면에 웬 꼬마 아이가 나와 재담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영어로 진행하는 일종의 토크쇼였습니다.

영어공부도 할 겸 평소에도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어서 채널을 고정하고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화면이 바뀌어 네 쌍둥이 소녀아이들이 나와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제 시선을 빼앗은 것은 그 다음 장면이었습니다.

한 흑인 여자 아이가 기찻길을 걷고 있습니다. 몇 걸음 가다가 진흙 구덩이에 빠집니다. 공교롭게도 그때 기차가 와서 아이의 한쪽 팔을 앗아갑니다. 아이는 병원으로 옮겨져 한쪽 다리를 절단합니다. 불행 중에도 불구가 된 아이를 돕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는 아이에게 의족을 달아주고 그의 친구 부부는 아이를 입양하여 훌륭하게 키웁니다.

아이는 못 하는 것이 없습니다. 한쪽 팔과 의족의 도움으로 농구도 하고 피아노를 치고 수영도 합니다. 평소에는 긴팔 옷을 입어서 드러나지 않는 잘려진 팔과 다리가 수영을 할 때는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그런 것쯤이야 아랑곳하지 않는 아이지만, 문제는 그런 몸으로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아이의 양부모는 걱정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수영을 배우고 싶어 했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결과 끝내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영상으로 먼저 만난 그 아이가 토크쇼의 무대로 나오는 그 순간, 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른 자세를 취했습니다.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빴습니다. 아이가 사회자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저는 '아름다움'과 '건강함'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사회자는 아이에게 "우린 네가 너무 자랑스러운데 너도 네 자신에 대해서 자랑스럽니?" 하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얼마간(kinds of)"이라고 짧고 재치 있게 대답했습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저는 서재로 건너가 컴퓨터를 켜고 그 아름다운 장면을 요약 정리하여 저장해두었습니다. 개학을 하면 아이들에게 들려줄 요량이었지요. 타이핑을 끝내고 잠도 오지 않아 <오마이뉴스> 기사를 검색했습니다. 제주도에 사시는 김민수 기자님께서 올리신 기사가 얼른 눈에 띄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께서 뭐가 '조금, 아니 많이' 짜증나셨을까? 궁금한 마음에 기사를 읽어보니 "아, 그랬구나!" 하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다음은 기사 내용의 일부입니다.

'오늘 야당대표의 연두기자회견을 들었습니다. 그냥 운전을 하다가 우연히 들었는데 참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렇게 국민을 존경한다 어쩐다, 나라를 사랑한다 어쩐다 하는데 과연 그들에게 그런 의지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야당지도자라는 사람이 전교조라는 단체를 아예 빨갱이 취급하고 어느 하나 트집 잡아 싸잡아 매도를 합니다. 차 안에서 함께 기자회견을 듣던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그려, 그려" 합니다. 전교조, 나도 그들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렇게 한나라당에서 빨갱이 취급을 하고 있는데 명예훼손죄나 불고지죄 같은 것으로 고소를 안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저는 야당 대표의 연두기자 회견을 듣지 못하고 나중에 기사로 읽었습니다. 담담했지요. 이미 알고 있는 패를 나중에 확인하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전교조와 관련된 내용도 크게 분개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황당하고 시대착오적인 야당대표의 발언 속에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 대한 희망이었지요. 제가 학교에서 만나는 보통아이들 말입니다.

너희들이 희망이구나!

저희 학교는 실업계여서 그런지 학생들의 가정환경이 썩 좋은 편이 아닙니다. 그들의 가정환경과 엇비슷하게 아이들의 성적이나 능력도 고만고만하지요. 그러니 모 야당 의원들처럼 세칭 일류대학을 나와 법조계나 경제계에 종사하면서 국회의원까지 하는 걸출한 인재가 나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딱히 실업계가 아니라도 학교에서 만나는 보통 아이들이 TV에 출연하여 국민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할만한 사람이 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요.

지금 세상은 최고 숭배에 빠져 있고, 방송매체에서도 '역사는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식의 부추김을 통해서 그릇된 일등주의를 확대재생산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최고가 되기 어려운 보통아이들은 희망이 없는 것인가? 세상이 부추기는 것처럼 최고의 인생만이 참다운 보람과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이 학교에서 미래세대인 아이들을 만나는 교사로서 저의 오랜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최고가 된다는 것이 별개 아니구나. 아니, 적절하지 못한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되면 그로 인해 역사가 뒤로 가기도 하겠구나. 많이 배우고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사람답게 사는 것만은 아니구나. 비록 공부를 못하고 능력이 떨어져도 바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구나. 그래, 너희들 최고가 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래, 너희들 기죽을 필요 없겠구나. 아, 순박하고 착실한 너희들이 희망이구나.'

눈치를 채셨겠지만 저는 전교조 조합원입니다. 조합원 활동을 하면서 분회장직을 10년 이상 맡았으니 조합원 중에서도 열성 활동가에 속합니다. 제가 전교조 조합원이 된 것은 순전히 아이들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전교조를 선택했습니다.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저와 같은 생각으로 전교조 활동을 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참 많습니다.

인간으로서, 교사로서 부끄럽지 않은 한 해를 위하여...

좀 우습지만 고백합니다. 저는 친북세력이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전교조 조합원 중에서 친북세력으로 의심이 가는 선생님은 거의가 아니라, 한 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야당대표와 그의 수하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교조가 빨갱이요, 친북집단이라도 외쳐대니 황당한 일이지만 그리 속상할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친북세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만입니다.

제가 누군가를 때린 일이 없는데 그 사람은 저에게 맞았다고 야단을 치면 처음에는 화가 나고 억울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자꾸 그런 일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그 사람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를 연민할 일이지 제가 속상할 일은 아니지요. 그리고 제가 사람을 때릴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사람들이 제 주변에 많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제가 담임 맡고 있는 서른다섯 명의 예쁜 제자들. 가끔 집으로 전화하여 자녀들의 문제로 상담을 하거나 안부를 묻곤 하는 학부형님들. 그 분들 중에는 그래야 하는 것인 줄 알고 학교나 집으로 무언가를 들고 오셨다가 저에게 꾸지람만 듣고 얼굴을 붉히고 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기분 좋은 꾸지람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장담하지만, 저희 학교 전교조 조합원에 가입하려면 적어도 그 정도의 도덕적 수준은 유지해야 합니다. 물론 전교조 조합원이 아닌 교사 중에도 훌륭한 분들이 계시지만 말입니다.

저는 생일을 맞은 제자들에게 생일 축시를 써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략 800명의 제자들에게 시를 써서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800명의 제자들은 제가 친북세력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한 소박한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교단에서 북한을 찬양하는 그런 문제의 발언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지금 저와 함께 근무하고 있는 60여분의 동료 교사들. 그분들은 전교조 교사이건 아니건 제가 친북세력이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확신할 수 있냐고요? 제가 친북세력이 아니니까요. 제가 알고 있는 대다수 전교조 조합원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요. 그렇다고 열을 내거나 속상해하는 조합원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럴만한 가치도, 필요도 없기 때문이겠지요.

다만 바라기는, 일부 정치권이나 보수 언론에서 자행하고 있는 전교조 죽이기, 혹은 전교조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을 이제 그만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국력 낭비요, 국민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릇 큰 사람이 취해야 할 태도도 아니지요. 사학법 개정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과 별 상관이 없는 전교조를 들고 나오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입니다.

이제 곧 설이 돌아옵니다. 저는 한 인간으로서, 교사로서 부끄러움 없는 한 해가 되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지요. 철로를 걷다가 사고를 당하여 불구가 된 아이는 좋은 어른을 만나서 새 삶을 얻었습니다. 저도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좋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참, 아이들에게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잊지 말고 꼭 들려주어야겠네요.

정치적인 계산에서 나온 악의적인 비방이 아니라면 전교조에 대한 비판에도 귀를 기울일 생각입니다. 두루두루 행복한 설이 되시길 빌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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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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