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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21일 모산봉으로 가는 길
2006년 1월 21일 모산봉으로 가는 길 ⓒ 김환희
아내와 나는 장갑과 마스크를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 날씨는 맑았지만 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아내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가끔 나를 흘끗 보면서 눈치를 살피곤 하였다.

"여보, 저를 이길 자신이 있어요?"
"난 자신 없는 내기는 절대로 하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이나 잘 하구려."
"지금이라도 포기하시죠? 네?"

아내는 웃으면서 나를 약올리기 시작했다. 아내의 그런 말투가 나의 오기를 더욱 자극했다. 나는 아내에게 질세라 더욱 힘차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집에서 5분쯤 걸어가자 모산봉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까지 산허리 쪽으로 잔설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나뭇가지에는 물이 오르고 있었다.

산에 오르기 전 아내는 나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해 주었다. 사실 아내는 지난 여름부터 살을 빼기 위해 이 산을 매일 오르고 있어 이 산의 지형과 산을 오르는 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2006년 1월 21일 눈덮인 등산로
2006년 1월 21일 눈덮인 등산로 ⓒ 김환희
"여보, 절대로 무리하게 올라가지 마세요. 그리고 힘이 들면 잠시 쉬었다가 올라가세요."
"당신이나 무리하지 말고 올라가구려."
"자, 그럼 당신부터 출발하세요."
"아니요. 여자인 당신부터 먼저 올라가구려."
"내기인 만큼 봐 주기 없어요."
"좋아요."

나는 남자의 자존심 때문에 여자인 아내를 먼저 앞장 세웠다. 아내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천천히 산을 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내의 뒤를 따르며 보폭을 유지했다. 내기인 만큼 아내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서서히 앞서 나갔다. 그런데 아내는 앞서가는 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불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내 뒤를 따라오던 아내가 앞서가는 나를 향해 천천히 가라고 계속해서 주문을 하였다.

"여보, 천천히 올라가세요."

2006년 1월 21일 눈덮인 저수지
2006년 1월 21일 눈덮인 저수지 ⓒ 김환희
2006년 1월 21일 물오른 나무
2006년 1월 21일 물오른 나무 ⓒ 김환희
나는 아내의 그 말이 작전상 하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아내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오로지 이기겠다는 일념 하나로 고지를 향해 올라갔다. 그런데 산 중턱에 다다르자 도저히 숨이 차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등줄기에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이마 위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내가 어디쯤 왔을까 궁금하여 산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아내는 약 10m 떨어져 열심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아내는 처음과 똑같은 속도로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야 아내가 처음부터 속도를 내지 말고 천천히 올라가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침내 아내는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올라오더니 물을 건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내의 얼굴 위에는 땀 한 방울 맺혀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혀 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나하고는 정반대의 표정을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2006년 1월 21일 등산로를 오르며
2006년 1월 21일 등산로를 오르며 ⓒ 김환희
아내는 내가 보는 앞에서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자신감을 과시했다. 그리고 앉아 쉬고 있는 나를 뒤로 한 채 계속해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었다. 아내를 따라 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무리였다.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난 것 같았다.

가까스로 산 정상에 오르자 아내는 간단한 운동을 끝내고 땀을 말리고 있었다. 정상에 올라 온 나에게 아내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여유가 있어 보였던지 부럽기까지 했다. 아내와 나는 벤치에 앉아 잠깐의 휴식을 가졌다. 그동안 밤낮으로 아이들과 시름을 하면서 뒤돌아 볼 겨를이 없었던 나의 교직 생활. 누구보다 아내는 나의 이런 생활을 묵묵히 지켜보며 안타까웠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고심 끝에 바쁘게 생활하고 있는 나에게 잠깐의 여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 날 저녁, 내기에서 진 대가로 난 아내에게 맛있는 저녁을 사주었고 오랜만에 영화를 보면서 잠깐의 휴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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