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호주 산불의 절반 이상, 많으면 3분의 2 이상이 방화에 의해 발생한다. 지역소방연합 산불예방 홍보사이트(www.quinnsrocksbfb.org.au)에 실린 사진.
소방관이 되고 싶었지만 채용시험 때마다 번번이 고배를 마신 호주의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못한 채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산불현장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자원봉사 경력이 쌓인다면 정식 소방관이 되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 그는 불이 난 곳마다 매번 정복차림으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며 최일선에서 진화작업을 벌여왔다. 이런 사연이 알려지면서 그는 지역사회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년2개월 뒤, 그는 25건의 산불을 낸 혐의로 기소돼 2년형을 선고받았다. 2001년 1월부터 2002년 3월까지 자신이 직접 불을 내고, 또 직접 끄는 자작극을 꾸몄다는 것이 구속 사유였다. 그의 이름은 벤으로, 10학년 과정(중학교 졸업)을 마친 뒤 패스트푸드 점과 트럭 세차장 등에서 일해 왔다. 하지만 불성실한 태도로 일자리를 잃은 뒤, 시쳇말로 백수로 지내다가 2001년 고향에서 자원봉사 산불진화요원이 되어 방화를 시작했다. 산불진화 경력이 늘어날수록 정식 소방관으로 채용될 가능성이 높아지리라는 어이없는 기대가 방화동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소방서에서 호출도 하기 전에 이미 현장에 출동해있는 등 그의 지나친 열성이 오히려 동료들의 의심을 사기 시작하면서 그의 방화행각도 막을 내리게 됐다.
- 2005년 7월 호주범죄학연구기관 AIC가 발표한 방화범 사례연구


역사상 가장 더운 여름을 맞고 있는 호주에 2006년 새해 벽두부터 연달아 산불이 발생해 열기를 더하고 있다. 그 가운데 상당수의 화재가 방화범에 의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무더위, 산불 ... 최악의 여름

섭씨 45도를 기록한 새해 첫날, 고온과 강풍 탓에 뉴사우스웨일스(NSW) 주에서 40건의 크고 작은 산불이 발생한 것을 비롯해 중부해안 지역 곳곳에서도 농경지와 가옥, 가축 등이 피해를 입었다.

정부통계국에 의하면 지난 1967년부터 1999년까지 약 30년 동안 산불로 인한 사망자는 223명, 부상자는 4185명에 이르며, 6억5400만 호주달러의 재산피해를 낸 것으로 집계됐다. 재산피해로만 본다면 홍수나 지진, 태풍 등 다른 자연재해보다 적지만, 인명피해 면에서는 산불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48%로 자연재해 중 최고 수치다.

▲ 계절에 따른 지역별 산불경고.
ⓒ 정부홈페이지
'검은 금요일(Black Friday)'로 불리는 지난 1939년 빅토리아 주의 산불은 순식간에 71명의 인명과 1천 채의 가옥을 앗아갔으며 2백만 헥타르 규모의 토지손실을 가져와 7억5천만 호주달러의 피해를 기록했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기록된 지난 1983년 2월의 빅토리아 및 남부호주 산불도 사망 76명, 파괴가옥 3천 동 등 4억 호주달러 규모의 피해를 냈다. 1994년 1월에 발생한 시드니 인근의 산불은 주택가와 인접한 거리에서 무서운 불길과 연기를 내뿜으며 13일 동안 지속되었는가 하면, 지난 2003년 1월에는 수도 캔버라 일대에 번진 불길로 불과 36시간 만에 3억 호주달러의 피해를 기록했다.

인명과 재산 피해와는 별도로 자연환경과 생태계 파괴, 불에 타죽는 수많은 동물들, 삶의 터전을 잃고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는 야생동물들의 피해상황을 고려한다면 산불로 야기되는 자연 사회 경제적 충격과 손실은 막대하다. 문제는 이런 화재의 상당수가 고의적인 방화에 의해 벌어져왔다는 점이다.

▲ 하늘까지 붉게 물든 산불현장.
ⓒ 호주 토털환경센터 제공
산불의 3분의 2는 '방화'

이달 초 NSW 소속 소방연합은 "최근 NSW 중부해안에서 발생한 4건의 대형 산불 가운데 최소 1건 이상이 고의에 의한 방화로 추정되며, 산불 발생의 절반 이상, 많으면 3분의 2가 자연발생이 아닌 방화로 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캔버라 소재 한 범죄연구단체도 지난 2001년에서 2004년 사이 NSW주에서 발생한 산불 450여 건을 분석한 결과 담배꽁초 등 사고로 인한 발화와 자연발생 50여 건을 제외한 나머지 4백 건 가까이가 방화였다고 밝혀, 위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했다.

이와 관련, 이 문제를 연구해온 상원의 크리스 엘리슨 의원은 지난 2004년 '방화로 인한 산불'이라는 주제로 열린 연구 발표에서 "국민 대다수는 산불이 건조한 기후 때문에만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 같은 인식의 오류가 오히려 방화범에 대한 무장해제를 부르고, 방화에 대한 경각심을 마비시키며 그 결과 예방책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004년 AIC에 범죄 사례연구를 발표한 범죄 심리 전문가들에 따르면 산불방화범들은 보복이나 짜릿한 흥분을 위해 불을 지르는 일반 방화범들과 달리 주위의 시선을 끌거나 관심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소위 '영웅심리'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방화를 일삼아온 벤의 경우도 2001년 9ㆍ11 테러 당시 뉴욕에서 구조 활동을 벌이던 소방대원들의 활동상을 방송을 통해 보고 난 후 영웅심에 자극을 받아 곧바로 3건의 연쇄방화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인정받고 싶어서' '영웅 되고파' 불 질러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지나친 나머지 심지어 현직 소방관들이 직접 방화에 가담한 사례도 적지 않다.

▲ 호주산불 방화범중에는 소방관이나 자원봉사대원도 상당수다. 이들은 소위 영웅심리 때문에 방화를 저지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 호주 토털환경센터
<시드니 모닝헤럴드>지가 연초에 보도한 '방화 산불 특집기사'에 따르면 3년 전 NSW 주 경찰 특별 수사대에 의해 기소된 방화범 가운데 자원봉사자 및 정식 소방대원들만 10명에 달했다. 이들 중에는 산불진화 현장에서의 검게 그을린 모습으로 언론에 보도된 사람도 있다.

범죄 심리 전문가들에 따르면 산불 방화범들은 가족이나 직장 문제 등 사회적으로 외톨이로 지내기는 하지만 정신적 장애나 정신 병력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앞서 사례로 든 연쇄 방화범 벤의 경우도 자신이 고의로 불을 놓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의 행동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걸 예견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한편 호주 산불 대부분이 방화범의 소행이라는 분석과는 별도로 도난차량에 지른 불이 산불을 야기하는 이른바 '차량절도와 산불의 연관성'에 대한 지적도 나오고 있다.

호주의 대표적 자동차 보험회사인 NRMA는 2003년 통계자료를 인용하여 "NSW 주에서 연 1천 대의 자동차가 도난을 당하는데, 도난 차량 5대 중 1대가 절도범들에 의해 인근의 야산이나 나대지 등에서 소각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증거인멸을 위해 훔친 차량을 태워버리는 것이 가장 안전한 처리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기 때문에 절도차량에 대한 방화가 좀체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것.

NRMA측은 차에 붙은 불이 고온의 열파와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산으로 번지는 일이 많기 때문에 차량도난만 막아도 산불을 줄이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소방관과 산불 현장.
ⓒ 지역소방연합 산불예방 홍보사이트
방화범 소행이든, 차량절도범 소행이든 호주에서 발생하는 산불의 상당수는 결국 '인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막대한 재산 및 인명 손실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들 산불 방화범의 상당수가 영웅심리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는 점에 비춰볼 때 소방대원 및 자원봉사 모집 및 운영에 좀더 철저한 관리가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