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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입니다.
책 겉그림입니다. ⓒ 갈라파고스
"무한에 대한 공포나 완전한 허무의식, 이것은 어쩌면 문명인만이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가 쓴 <데르수 우잘라>(김욱 옮김·갈라파고스)에 쓰여 있는 글이다. 인류학자요 지질학자였던 아르세니에프는 1902년부터 1910년에 걸쳐 러시아 극동지역을 탐험했는데, 당시만 해도 지도상에는 공백지대로 남아있던 우수리 지방과 시호테 알린 산맥 일대를 탐사하면서, 그 지역의 울창한 밀림지대와 광활한 대지를 돌면서 느낀 두려움을 그렇게 고백했던 것이다.

그 같은 두려움은 문명인들에게는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끝도 보이지 않는 무한한 숲 속이나 드넓은 습지와 광야를 돌면 그 같은 공포는 자연스레 밀려들 것이다. 또한 문명인들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의 변화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변화에 대해 어떠한 종교적인 의미나 교훈, 그리고 해석 같은 것들을 부여하기에 바쁠 것이다.

그러나 늘 자연과 더불어 삶터를 꾸려왔던 자연인, 이른바 야만인으로 불리는 그들에게는 그런 공포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나고, 그 속에서 자라고, 또 그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그들에게 그 환경의 변화들은 살가운 현상이요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문명인들이야 비록 그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 변화의 현상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석을 더할지 모르지만 자연인인 그들은 어떠한 의미도, 어떠한 해석도 부여하지 않는 채 그저 있는 그대로만 바라볼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야만인으로 불리는 자연인들이야말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오히려 늘 자기들만의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기에 바쁜 도시 문명인들이야말로 무거운 족쇄를 차고 있는 노예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아르세니에프와 그가 중심에 선 탐험대를 친히 자연 대지 속으로 이끌고 안내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자연인 '데르수'였다. 데르수는 그 지역 숲 속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서, 그곳에서 사냥도 하고, 채집도 하며, 나름대로 물물교환도하며 생활해 왔다. 그렇다고 이익을 내기 위한 거래를 하거나 채움을 위한 살생 같은 것은 전혀 생각지 않았다. 숲 속에서 삶터를 꾸려왔기에 그가 사용하는 말 또한 그저 어린아이 같은 발음을 할 뿐이었다. 그는 단지 자연인으로만 살았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문명인인 아르세니에프는 데르수가 하는 몸짓도 말도 그리고 일들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자연과 교감하며 살며, 자연 동식물들과 대화하듯 살아왔던 데르수를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의 별똥별이 떨어지거나 움직이는 이치라든지, 바람과 구름이 돌면서 큰비를 몰고 오는 이치들은 문명인에게는 난해한 일이었지만 자연인인 데르수에게는 너무나도 환한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이런 지도를 읽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던가. 내가 휴대한 지도는 대단히 상세해서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은 감히 해독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문자를 써 본 적이 없는 이 눈앞의 야만인은 자연에서 갈고 닦은 경험과 노련한 눈썰미로 문명이 이룩한 지도를 꿰뚫고 있었다."(266쪽)

더욱이 물살에 휩쓸려 가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생을 포기하면서까지 타인을 살려내는 것은 결코 문명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문명인들은 그야말로 실오라기 같은 이익이 없이는 그 어떤 희생과 죽음도 결코 감수하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연인 데르수는 아르세니에프와 그 탐험대 일행들이 그와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지면서까지 그들을 살려냈다.

그래서 그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아르세니에프는 그 모든 탐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자연인 데르수를 데리고 왔다. 이를테면 야만사회에서 문명사회로 진입케 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연인 데르수에게 그 문명사회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집만 해도 그에겐 감옥과 같은 곳이었고, 사 먹는 물조차도 왜 사먹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문명사회에서 돌고 도는 일들이 자연인 데르수에게는 그저 족쇄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이야 그 지역에 이름도 붙이고 구획도 정했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시베리아 일대는 공백상태로 남았던 까닭에 태곳적 옛 모습을 그대로 지녀왔다. 그런데 그 지역 일대를 고대 한민족의 발상지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이 책 속에도 몇 몇 조선인이 등장하여 그들만의 삶터를 꾸리고 있는 게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다만 오늘날의 세상에 비추어 자연인 데르수가 살았던 그 자연 속 자유로움과 조화, 이른바 함께 사는 맛과 멋을 한껏 새겨 넣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가 아니겠나 싶다. 자연인 데르수가 오늘날의 문명사회에 던져주는 그 오묘한 삶을 한 번쯤 새겨볼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데르수 우잘라 - 시베리아 우수리 강변의 숲이 된 사람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 지음, 김욱 옮김, 갈라파고스(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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