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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3일에 올렸던 나의 첫 인터뷰 기사. 비록(?) 잉걸로 머물렀지만 네티즌 편집판을 장식하면서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기사였다.
지난 7월 13일에 올렸던 나의 첫 인터뷰 기사. 비록(?) 잉걸로 머물렀지만 네티즌 편집판을 장식하면서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기사였다. ⓒ 이동환
지난 6월 말. 세계청소년축구대회를 지인들과 술 마시며 지켜보다가 받은 '열'을 삭이지 못하고 술김에, 그것도 문외한이 한국축구가 어쩌고저쩌고 막 갈겨댄 게 첫 기사다. 술에 취해 홧김에 저지른 서방질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다음날인가 <오마이뉴스>에 접속했는데 어라? '기사'로 걸렸네? 야, 이거 재미있다. 신이 나서 그날 밤에 이 동네 저 동네 어르신들 등치는 약장수 이야기를 하나 썼더니 어라? '톱기사'로 걸리네?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바둑이야기를 다섯 꼭지 이어쓰기 하며, '극장전' 응모기사까지 십여 일 동안 여덟 꼭지의 기사를 마구 풀어댔다. 이제 막 기사를 쓰기 시작한 나로서는 응모기사까지 당선되고 보니, 늦바람 난 사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신명이 났다. 20여 년 이상 쓰지 않던 글을 다시 쓰면서 잊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실 나는 신춘문예철만 되면 가슴앓이를 해대던 문학청년이었다.

그러나 모 월간지 추천에 관여하던, 평소 존경하던 교수가 뒷돈거래에 넋을 파는 모습을 본 뒤 정나미가 떨어져 글쓰기를 포기하고 살았다. 글 써서 밥 먹고 살 수 없음을 일찍 간파한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내가 왜 문학을 공부했던가, 하며 땅을 치기도 했다.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때려치우고 전국을 돌며 방황하다가 학원 강사로 자리를 잡으면서는 남의 글만 보고 평가했지 내가 글 쓰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절필 아닌 절필이었다.

어쨌거나 쓰면 쓸수록 신이 났고 쓸 거리는 넘쳐났다. 이 기사까지 지난 여섯 달 동안 예순아홉 꼭지를 썼다. 그 가운데 두 꼭지는 생나무로 사라졌다. 잉걸기사부터 sT(섹션톱), mS(메인서브), mT(메인톱), wT(주말판)기사까지 골고루 거치면서 '7월의 새뉴스게릴라', 11월에는 '이달의 뉴스게릴라' 상을 받았다. 기사 쓰기 시작하면서 블로그도 개설해 꾸준한 방문자를 모시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나보다 먼저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고 있는 지역 후배가 "<오마이뉴스>를 여섯 달 만에 평정했네?"하며 농을 던질 정도로 단 시간에 어느 정도 알려진 시민기자가 되었다. '2월 22일상'까지 노리는 게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단연코 말하건대 그건 아니다. 1년 동안 활동해온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사실 2007년 2월 22일상을 준비(?)하고 있다. 모 후배가 "형은 욕심이 많은 거요, 아니면 열정이 많은 거요, 아니면 푼수요?"라고도 한다.

내가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는 이유

술을 덜 마실 수 있어서다. 부끄럽지만 나는 알코올중독자다. 오랜 학원 강사 생활을 하면서 새벽 퇴근 때마다 한 잔 술로 심신을 달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중독자가 되었다. 안주는 풀리지 않는 인생과 강사 중간 중간 벌인 사업마다 말아먹으며 사로잡힌 패배주의였다. 지난 5월까지, 입시학원의 부원장으로 근무했던 만 1년 동안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소주 한 병 이상을 마셔댔다. 상대가 없으면 혼자서라도 마시고야마니 중독자 맞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면서부터 술을 덜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학원에 출강하지만 새벽 퇴근 뒤, 한 잔 술보다는 빨리 집에 가서 블로그 관리하고 글 쓰는 일이 급해진 것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 밤새는 줄 모른다고, 이 일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다. 술을 덜 마시고도 살 수 있다는 게 나로서는 가장 큰 매력이었다. 매일 마시던 술을 지금은 일주일에 한두 번 마시기도 바쁘니 장족의 발전이다.

두 번째 기사를 쓰면서 나는 "아, 이거라면 내가 술을 덜 마실 수 있겠구나" 하고 느꼈다. 신바람 난 나는 세 번째 기사부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뭘 연구해? <오마이뉴스>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선배 기자들과 '오마이블로그'를 통해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블로거들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사방팔방 휘젓고 다니며 구석구석 아는 척을 하고 돌아다닌 끝에 나는 금세 '오마이블로그'의 마당발(동네아줌마)이 되었다.

마흔 다섯 나이의 남자를 다시 키 크게 한 사람들

후배들 말마따나 짧은 여섯 달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을, 기자들을 만났다. 마흔 고개를 넘기면서 "고민하지 말고 살자, 생각 깊이 하지 말고 살자"라고 스스로에게 주문했던 나는 지난 여섯 달 동안 참으로 많은 고민과 상념, 깊은 번뇌에 사로잡혀 살았다. 첫 번째 고민과 상념은 지난 10월 초에 찾아들었다. 메일 한 통이 계기였다. 나만큼이나 입담이 건 필치로 볼 때 가볍게 넘길 글이 아니었다.

"거 언제까지 집안 얘기 우려먹을 거요? 재미는 약간 있소만 그러다가 마누라 엉덩이 점 얘기까지 나오겠소! 그래봤댔자 반짝하고 말겠지만. 내년 이맘때도 이동환 기자 글이 올라올까 몰라."

메일 보낸 사람이 언제 우리 마누라 엉덩이를 봤는지 안 봤는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처음에는 웃고 넘기다가 어라, 이 말도 맞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고 있지?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기껏 정성 들여 써놓았더니 '잉걸'이야? 어라, '생나무'까지? 누구야? 내 금쪽같은 글을 푸대접하는 사람이, 편집부 거 누구야?

젊어 한때 출판사에도 있어 봤고 최근까지 몇몇 문화재단에서 위촉집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나를 <오마이뉴스> 편집부가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하는 생각에 번뇌가 일었다. 그러나 그런 덜 익은 고뇌가, 기사 배치를 두고 '자기 연민에 빠진 나르시스의 투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학원 강사도 선생은 선생 아닙니까? 애들 앞에 정녕 부끄럽지 않으려면 편향된 주장을 기사랍시고 올리지는 않겠지요? 당신 자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떳떳한지 말예요. 뉴스게릴라상? 우쭐대지 마세요. 그리고 어줍은 지식 자랑 하지 마세요."

얼마 전 받은 위 메일과 관련된 기사는 댓글뉴스에 내 목소리까지 나갔는데, 수백 통의 항의 글이 쇄도해 그 당시 오피스아웃룩이 에러가 날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저렇듯 간간 온다. 어쨌거나 전부 맞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부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고백하건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에이 더러워! 기사 그만 써야지" 하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내 발목을 붙든 건 블로그를 열면서 아들과 한 약속이었다.

"아빠가 앞으로 이 블로그에 기사 가득 채워서 네게 남겨주마. 아빠가 어떤 생각으로 살았는지 나 죽은 다음에도 네가 알 수 있게 말이야."

무엇보다도 젊은 시민기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새로운 것들을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고정관념과 굳어버린 중년의 사고방식에 갇혀 살았던가 하는 문제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내 기사가 왜 생나무였는지, 왜 잉걸로 전락(?)했는지를 스스로 깨우치게 되었다. 내 지난 기사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왜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는지 그 명확한 이유를 다시 한 번 가늠해보았다. 비로소 마음의 평온이 찾아들었다.

<오마이뉴스>에 계속 글을 쓰기 위하여

지난 여섯 달. 나와 함께 고생한 안방 컴퓨터. 지난 한 해 고생 많았다. 면목 없지만 새해에도 부탁한다.
지난 여섯 달. 나와 함께 고생한 안방 컴퓨터. 지난 한 해 고생 많았다. 면목 없지만 새해에도 부탁한다. ⓒ 이동환
2005년을 마감하려는 지금, 나는 나이 40을 넘기면서 다짐했던 것처럼 다시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고민 없이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시민기자로서의 자기 만족과 함께 과분하리만치 받았다는 생각도 깨달음에 일조했다. 내후년, 즉 2007년 2월 22일상이야 못 받아도 그만이고 그래봤댔자 더 이상 내 마음에 번뇌는 없다. 나는 꾸준하게 스스로 점검하면서 글을 쓸 테고 잉걸이 되든지 생나무가 되든지 연연해하지 않으면서 '덤덤함'을 유지할 것이다.

그래서 이 지면을 빌어 그동안 내 기사에 댓글 달아주신 분들, 메일 보내주신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비난이었든 격려였든 간에, 그 모든 하나하나 글이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이미 다 자라 버린 줄 알았던 중년의 나이에도 키가 클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준 소중한 분들이다. 더불어 심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를 만나주며 또 가르쳐준, 선배기자면서 인생후배들에게 깊은 감사의 배례를 올리고 싶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나는 2006년을 열고 싶다. 와락 한 번 끓다가 바로 식어버리는 양은냄비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스스로를 돌아볼 것이다. 12월 마지막 주에 다시금 맛보는 이 평온함과 안정감, 그리고 균형감과 만족감을 나는 기사를 통해, 블로그를 통해 계속 달일 것이고 깊게 우려내련다. 가장 뼛속 깊이 박힌 어느 독자의 말 한 마디를 새기면서.

"이동환 기자 글을 내년 이맘때도 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께 미리 올리는 새해 인사
새해에는 그저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가운데 희망을 발견하시기 빕니다. 저도 아들과 단 둘이 가진 송년회에서 손가락 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쓸 겁니다. 담배 끊고 술도 지금보다 더 줄이고…. 여러분도 새해에는 실현 가능한 계획 세우셔서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내년 이맘때도 우리 희망을 얘기합시다. 지난 한 해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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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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