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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제 저녁.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로 향했다. 초지대교는 김포와 강화를 연결해주는 다리이다. 초지대교 위의 겨울바람은 매서웠고 다리를 밝히고 있는 가로등 불빛은 차가웠다. 어둠에 묻힌 강화도는 인적마저 드문 채 12월의 긴 겨울밤 속으로 유유히 침몰하고 있었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마리산 입구. 깊은 어둠을 휘젓는 찬바람 탓인지 유난히 을씨년스러웠다.

"추운데 오시느라 수고 하셨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왜 집으로 오라 그러셨어요? 제가 두 분께 식사 한 끼 대접해 드리려고 했는데..."
"아유. 정혜 기자님 마음만으로도 충분해요. 추운데 어서 들어가세요."
"이게 아닌데..."

전갑남 선생님과 사모님의 사람 좋은 웃음에 이끌려 집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지난여름. 처음 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의 느낌이 생생했다.

높은 천장과 바깥이 한눈에 내다보이도록 격자창문으로 만들어진 한쪽 벽. 그것이 전부인 거실이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하얀 거실. 굳이 그 집 주인을 오래 겪어 보지 않아도 참으로 단아하고 깔끔한 성품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게 했었다.

ⓒ 김정혜
어제 저녁. 선생님 댁은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변해 있었다. 구수한 냄새와 따스한 불빛에 온 집안이 취해 있었다. 거실 한 쪽엔 낯익은 하얀 난로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엔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고구마가 익어가고 있었다.

ⓒ 김정혜
거실 중앙에 놓여진 상에는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고, 상 한 귀퉁이엔 빨간 열매 덤불 사이로 키 작은 초가 따스한 불빛을 하늘거리고 있었다. 상 옆에 세워놓은 3층 접시에는 갖가지 과자며 초콜릿들이 아기자기하게 담겨져 있었다.

ⓒ 김정혜
"어머나. 언제 이렇게 준비하셨어요?"
"아유. 아무것도 차린 거 없어요. 그저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요."
"번번이 저를 부끄럽게 하시네요. 오늘은 정말 제가 대접해 드리고 싶었는데..."

"우리가 정혜 기자님에게 뭘 해드린 게 있다고 대접을 받아요. 이렇게 와 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데요."
"자, 자, 일단 앉아서 먹읍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잖아요."

ⓒ 김정혜
선생님이 한잔 가득 채워 주신 오가피주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었다. 짜릿했다. 술이 아니라 정이니 짜릿한 게 당연하다 싶었다. 잘 삶겨진 돼지고기를 노릇노릇한 배추에 싸서 한 잎 밀어 넣었다. 고소했다. 고기가 아니라 정이니 고소한 게 또 당연하다 싶었다. 오가피주도 삶은 고기도 짜릿한 정으로 고소한 정으로 나를 채우고 있었다.

세상은 요지경이란 말도 있듯이 참 알 수 없는 게 세상살이인 것 같다. 선생님과 내가 이렇게 인연이 된 걸 보면 말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선생님과의 인연의 깊이는 과연 얼마나 깊은 것인지 새삼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또 선생님도 선생님이지만 사모님의 곰살맞은 애정에 난 가끔 특별한 희열을 느끼곤 한다.

"정혜 기자님. 지금 기자님이 사는 동네 지나가고 있어요. 잘 계시죠?"
"선생님이 들러서 정혜 기자님 맛있는 거 사드려야 된다고 하시네요."
"이거 우리가 농사지은 고구마예요. 드셔 보세요."
"친정 부모님 어디 편찮은데 없으시죠? 국 한번 끓여 드리세요."

뜬금없는 사모님의 전화에 또 방문에 번번이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수북하게 담긴 고구마 박스 속에 곱디고운 고춧가루가 들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었다. 추석명절에야 제사 모시는 사모님이 더 분주하실 터. 종종걸음으로 들리셔서는 친정 부모님 국 끓여 드리라며 족히 대 여섯 근은 됨직한 소고기를 손에 들려주고 가셨다.

따지고 들자면 인연의 끈을 먼저 내민 것은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전갑남 선생님이셨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의 만남이 그것이다. 알고 보니 선생님과 내가 사는 곳은 지척이었다.

그런 이유가 선생님과 나를 더 가깝게 이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선생님의 인연까지도 소중하게 보듬어 주시는 사모님의 지혜로움이 깊은 인연을 만드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정혜 기자님. 오늘이 크리스마스라고 선생님이 순대국 한 그릇 사신다네요."
"어머 어떡해요. 지금 시댁에 와 있는데..."
"네. 그러세요. 우리는 김포 나와서 영화 한편 보고 가는 길이에요. 선생님이 정혜 기자님 동네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운가 봐요."
"세상에. 자상도 하셔라. 두 분의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다 보답해야 할지..."

낯가림이 심한 남편이 두 분에겐 한없이 호의적인 것 또한 희한한 일이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 멍해져 있는 내 마음의 정체가 뜨거운 감동이라는 걸 남편이 눈치 채었나보다.

"올해가 가기 전에 식사 한 끼 대접해 드리자. 생판 남에게 그렇게 신경 써주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닌데, 두 분 참 대단하신 분들이야."
"그래. 당신 말이 맞아. 그리고 보니 두 분께 늘 받기만 했어. 식사 한번 대접해 드려야겠어."

굳이 집으로 오라는 사모님께 이번만큼은 꼭 밥 한 끼 대접하게 해 달라 단단히 못을 박아두었던 참이다. 그러나 앞치마를 두른 채 우리를 맞는 사모님의 환한 얼굴에서 이미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구수한 청국장에 얼지 않게 잘 보관한 듯 야들야들하고 속이 노란 배추쌈에 선생님이 손수 삶으셨다는 돼지고기까지. 천하 없어도 딱 한 그릇이 정량인 내가 밥을 두 그릇이나 먹어 치웠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에 웃고 떠드느라 겨울밤이 그리 깊어가는지도 몰랐다. 돌아갈 채비를 서둘러 마당으로 나오니 하늘에 드문드문한 별은 왜 또 그리 초롱초롱한지... 깊어가는 겨울밤도 초롱초롱한 별도 다 아쉬움이었으니 뭐라 다른 변명이 필요할까. 꽁꽁 언 가로등 불빛이 두 분이 흔들어대는 다정한 손짓에 따스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웃의 정이라 표현하기엔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피를 나눈 혈육의 정이 이보다 더할까 싶다. 매사에 성질 급하기로 소문난 나였다. 그것조차도 많이 헛됨을 느낀다. 무엇보다 정을 나누는 데 급한 성질을 들먹여야겠다. 두 분이 앞서 사랑을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서둘러 사랑을 드릴 수 있기를 노력해야겠다.

끝없이 깊어지고 있는 겨울밤. 창을 흔드는 찬바람이 겨울밤의 적막을 가르고 그 적막 속으로 두 분의 환한 웃음이 별이 되어 깜빡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 별은 내 삶 속에서 늘 그렇게 깜빡일 것이다.

힘들고 지루한 삶이 겨울밤처럼 하염없이 깊어진다 할지라도 그 별은 언제나 희망이 되어 반짝여 줄 것이다. 나도 두 분을 닮아야겠다. 그리하여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처럼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전갑남 선생님. 올 한해 두 분의 하염없는 사랑으로 인해 많이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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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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