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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이 겨우 넘었을 때 나는 고향 산골 어느 국민학교에서 교원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 풍상을 겪고 난 뒤였기 때문에 그때도 나는 조달(早達-나이는 어리지만 어른같아 보임)하였고 인생관이나 사회관이 겉늙었었다. 그 뒤 다시 뜻을 품고 바다를 건너가 학업에 골몰하고, 일제의 중압감에 억눌리고, 생활고에 허덕이고, 감방에서 매 맞고 그리고 해방을 맞아 야학을 위해 거리에 벽보를 붙이고, 고아와 더불어 잠자고, 교단에 서서 각혈하고, 작품을 써서 발표하고 신문에서 논쟁하고―이렇게 근 20년 동안 눈알이 핑핑 돌 정도로 변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마음은 오히려 20대 때 산골 학교 시절만치 웅대하지가 못하다…."

윤이상이 나이 서른 아홉에 생애에서 떼어 내고 싶은 지난 20년을 회고한 대목이다. 1917년생이니 한반도는 일제 강점기로부터 시작해서 1945년 광복과 동시에 민족이 이념적으로 분열해 갈라진 바로 그 시기를 말함이다.

▲ 윤이상 1
ⓒ 윤이상평화재단
그가 떼어 버리고 싶었던 이유도 한민족이 공유하는 이 20년이라는 역사가 "나라를 도로 찾았다는 일 이외엔 그리 명예롭지도 깨끗하지도 못하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는 80세를 살 것을 가정하고 "인생의 후반을 충실한 열매로만 장식하기 위해" 비장한 결심으로 새출발을 다짐한다.

"…먼저 최초의 3년간은 골똘히 공부하겠다. 2~3년 동안에 나의 타고난 자질이 현재의 것임에 틀림없는가 규명하겠다. 순조롭게만 간다면 앞으로 40의 반을 잘라 20년을 교육과 사회와 국가에 바치기 위해 떼어 놓는다. 다음 나머지 20년으로 매년 5년마다 교향곡을 한 곡조씩 쓴다 치고 교향곡이 4곡, 매년 실내악을 2곡씩 쓴다 치고 실내악곡이 40곡조로 하여 작품번호를 약 50곡은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80세를 살았지만 40세부터 발병한 뇌병으로 인한 악전고투 속에서 살았던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나와 50세에 겨우 주목받기 시작한 작곡가 에두아르 랄로를 유익한 표상으로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 노력이 아무리 지극하다 해도 사회적 뒷받침 없이는 그것이 만방에 드러날 수 없음을 경고했다.

▲ 다름슈타트음악제에서 만난 20대의 백남준(왼쪽)과 윤이상
ⓒ 윤이상평화재단
"그러나 암만 연령을 뒤로 돌이켜도 사회조직이나 국가시책이 예술행위에 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전기의) 포레나 랄로를 육성한 프랑스라는 나라의 예술적 토양은 낭만에서 후기 낭만으로 이행하는 시대적인 추진력이 파도처럼 억세었다. 우리나라처럼 꺼질 듯 말 듯한 등잔불 같은 예술의 터전에서 기껏 마음을 돌이켜 가다듬어 보았댔자 지난 40년보다 더 험악한 지경이면 어찌하려는고. 그때엔 떼어 버린 20년을 도로 찾고 게다가 20년을 더하여서 인생의 종언을 스스로 촉구하게 될 것을 누가 장담하랴? 이 말은 어느 예지 있는 정치인이 있으면 그의 지성에 못을 박는 말로서 명각할지어다.

위의 글을 <새벽> 1954년 송년호에 실은 윤이상은 1955년 현악4중주곡과 피아노3중주곡을 출판하고 연주하여 1956년 제5회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한다. 같은 해 파리로 향한 윤이상은 파리국립음악원을 거쳐 1957년엔 베를린음대로 옮기고 그가 말한 대로 "골똘히" 공부하여 단 1년 만에 졸업을 성취했다. 1959년 네델란드의 가우데아무스음악제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 1958'이 연주되었고,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 하기 모임에서는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1959'이 연주되면서 서구음악사를 주도하는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때의 반향은 단지 인정을 받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향후 서구 현대음악의 방향 전환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해석된다. 그 영향력의 정도는 그가 받은 명예박사학위나 수많은 상과 훈장으로 입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들이 난무하는 요즘에는 그것들이 무용지물일 뿐만 아니라 문화의 본질을 가늠하는 척도와도 거리가 멀 것이다.

▲ 보름회(가운데가 윤이상 부부)
ⓒ 윤이상평화재단
윤이상은 "세상이 평화롭다면 자신은 작곡가가 아니어도 좋다"고 했다. 그것은 그가 문화의 본질을 올바로 꿰뚫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즉 문화의 주체는 인간이므로 그 중심에서 인간을 소외시킬 수 없으며, 또한 한 개인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 수 없는 만큼 문화에도 더불어 사는 삶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문화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잘 살아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문화를 예술과 혼동하며 머리 위에 얹는 가채쯤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일제는 소위 문화정책의 시기에도 한글 가사에 곡을 붙였다는 이유로 윤이상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였고, 1967년의 대한민국도 윤이상이 실정법을 어긴 죄 이상으로 누명을 씌우며 고문하여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가 1963년 북한을 방문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죽마고우 최상한을 만나 그의 가족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는 일이었다.

윤이상과 최상한은 통영 출신 친구들의 부부 모임인 '보름회'의 일원이었고, 회원들은 한국전쟁 후 월북한 최상한을 대신하여 남쪽에 남은 부인을 공부시켜 자립을 돕고 자식들 공부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최상한은 이 만남에서 윤이상의 음악은 자본주의적 지식인을 위한 효과음악이지 인민에게 봉사하는 음악이 아니라고 여기는 왜곡된 사회주의적 발상의 전형을 보여 줌으로써 선생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의 눈에 그가 간첩으로 보였다면 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어쨌든 윤이상은 이 여행에서 친구 외에도 그가 늘 벽에 붙여 놓고 바라보던 강서고분의 '사신도'를 직접 볼 수 있었는데 두 가지 사건이 다 4년 뒤에 하나씩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 하나는 간첩 혐의로 납치당하고 고문과 재판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대문 형무소의 차디찬 바닥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도 '사신도'의 정신적 경지를 '이마쥬 영상, 1968'라는 작품 속에 담아낸 것이다.

▲ 11월3일 조계사에서 열린 윤이상 10주기 추모음악회
ⓒ 윤이상평화재단
필자에게 이 장면은 희극이다. 한 예술가가 정에서 비롯된 지극히 인간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그 비극을 초래한 제 민족의 정부에 탄압받았지만, 그 순간에도 예술가는 민족적 유산을 노래하였다. 밖에서는 세계유산으로서 그의 작품 가치를 아는 자들이 그를 풀어 내라고 아우성쳤다. 세계 각국의 정치가들의 구명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때 181명의 국제적 음악가들이 서명하고 신문 1면에 인쇄되어 독일 전 지역에 배부된 호소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윤이상은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우수한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목적은 언제나 한국음악의 뛰어난 전통을 서양음악의 경향과 결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과 사람됨은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한국 외부에 알리는 귀중한 소개자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당신들의 문화에 대하여 아주 적은 것밖에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예술적인 노력에 의하여 한국의 사고양식을 가르쳐 준 사람은 그 이전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 국제 음악계는 윤이상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 동서양의 중개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한국음악의 대사로서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람입니다.

결국 윤이상은 196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지만 무죄판결로 인한 석방이 아니어서 완전한 명예회복을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그의 음악이 연주되는 것도 금기시되었고, 그는 차츰 잊혀졌다. 다행히 우리를 제외한 세계인들은 인고의 세월동안 그가 오로지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작품 위촉을 그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한해 평균 서너 작품을 쓸 수 있었고, 마침내 1982년 8월에는 그의 작품 '광주여 영원히'(1981)가 북한에서 연주되었고, 9월에는 대한민국 음악제에서 이틀간 '윤이상 작곡의 밤'이 열리면서 한반도에서도 오랜 침묵이 깨지게 되었다.

이후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윤이상은 교향곡 5개를 연작으로 발표하는데, 여기에는 모든 적대적인 것들의 화합과 세계평화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로써 그는 1988년에 독일 대통령으로부터 '대공로 훈장'을 받는다. 예술작품을 통해 자신이 속한 사회와 인류에 기여하고자 한 70대 노장의 꿈이 작품을 쓰는 데에만 그칠 리 없었다.

그의 주관으로 1990년 남북통일 음악제가, 10월에는 평양에서 12월에는 서울에서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그의 명예를 공식적으로 회복시키기는커녕 귀향의 소망마저 번번이 좌절시켰으니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망명자를 낳는 사회의 정치가 건강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사실 정치도 문화의 한 양상이다.

경직된 사회는 자신들을 고스란히 비추는 예술을 견딜 수 없어서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언제나 예술에 죄를 덮어씌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남북의 화합은 둘째치고 문화와 정치 혹은 예술과 정치의 화합이 시급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한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을 논할 자격이 없다.

윤이상은 1995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화염 속의 천사'(1994) 와 에필로그로 그가 늘 안타까워했던, 고귀한 뜻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영령들을 위한 진혼곡이었다. 그가 사회와 국가와 교육에 바치려 했던 20년에 대하여는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지만 그 자신이 소망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유럽에서 씌어진 것만 120곡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기고 갔기에 우리 후배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그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이어갈 수 있다고 위로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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