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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은 지각생이 좀 많은 편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손바닥을 딱 세 대씩만 내리치면 될 일을 속병처럼 끙끙 앓고만 있다. 그래도 후학기가 되면서 몇몇 아이들이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 보람에 출석부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데, 문제는 사랑으로도 이미 그어진 흔적들을 지워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매를 들어야 하는가? 그런 해묵은 갈등 속에서도 나는 아직까지 매를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 지각한 아이들은 늦게 온 시간만큼 방과 후 도서관에 남아 책을 읽어야 한다. 그 시간은 담임인 나와 데이트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청소 시간에 계단 청소를 마치고 잠시 도서관에 들른 지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방과 후에 선생님하고 데이트 해야겠네."
"생각해 보고요."

나로 말하면 동료 교사들로부터 '도사'라는 말을 들을 만큼 아이들과 느긋하게 대화를 잘하는 편이지만 요즘 아이들 수준은 보통이 넘는다. 그래도 어쩌랴? 교사에게는 학생을 선택할 권리가 없는 것을. 한순간 빨라졌던 심장 박동수가 진정이 되자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이렇게 대꾸했다.

"녀석아, 생각해 보다니? 잘못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그리고는 5분쯤 흘렀을까? 나는 지수를 다시 불렀다.

"지수야, 너 방금 전에 생각해본다고 했지?"
"예? 아, 그건…"
"너 혼내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처음엔 그 말이 좀 엉뚱하게 들렸는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되기도 해."
"예?"

"사람이 지각을 할 수도 있잖아. 지각하면 출석부에 적히니까 이미 불이익을 당한 거고 말이야. 그러니까 지각했다고 방과 후에 남아야 한다는 것은 이중으로 벌을 받는 셈이지. 아무리 도서관에 남아 책을 읽는다고 해도 그건 네가 원하는 것이 아니니까 벌은 벌이겠고. 혹시 그래서 생각해 본다고 한 거니?"

지각생을 위한 변명이라고나 할까? 문제는 그것이 지각생을 단속해야 할 교사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인데,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을 대신 내가 다해 버렸기 때문인지 평소 같으면 눈을 똑바로 뜨고 조목조목 따지기를 좋아하던 아이가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석양 무렵의 햇살처럼 눈빛조차 유순하고 따뜻해졌다. 잠시 후, 나는 지수를 데리고 교실로 갔다. 어수선한 교실을 잠시 정돈한 뒤에 아이들 앞에서 지수와 도서관에서 나눈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준 뒤 이렇게 말을 이었다.

"지각을 하면 그 시간만큼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로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지 여러분의 동의를 구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여러분의 동의를 구하고 싶어요. 아니, 그 전에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선생님은 아주 조금씩이라도 여러분이 인격적으로 성숙해지기를 바라고 있어요. 아무도 여러분을 벌하지 않아도 여러분 스스로 인격의 힘으로 학교에 일찍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죠?"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안다. 불과 며칠 못 가서 나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기 위해 다시 아이들 앞에 서야 하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런 순간이 거듭될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더 따뜻해지고 깊어지리라는 것도.

덧붙이는 글 |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조금 깁고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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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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