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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동태국은 추울수록 맛있다
맑은 동태국은 추울수록 맛있다 ⓒ sigoli 고향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눈보라 몰아치는 12월이면 나는 동태국이 먹고 싶다. 찌개가 아닌 동태국 말이다. 맑은 국을 원하지 얼큰하게 끓인다고 고춧가루를 풀어서 텁텁하게 끓인 국을 원치 않는다. 탕이나 매운탕도 싫다. 백숙이나 지리국처럼 맑아야 한다.

찬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시골 흙집 방안에서 내복을 입고 먹는 맛이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별미이자 내겐 둘째가라 하면 서러운 겨울철 보양식이다. 산란을 준비할 때라 마침 명태가 살이 토실토실 올라 있다. 한 솥 가득 끓이면 한 그릇으로 모자라 식구마다 두세 그릇을 비울 때가 많았다. 국을 먹고 있는 동안에도 당연히 밑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예고 없이 한파가 몰려오면 동태국 생각에 그 어떤 진수성찬도 이 간절함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잊을라치면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되고 생태라 한들 값만 비싸지 그 맛을 재현하기가 쉽지 않고 늘 가격과 맛이 한결같다.

살이 부서진다고 생태만 고집할 게 아니라 값이 훨씬 싼 동태는 곧바로 얼려서 해동만 잘 하면 생태못지 않다.
살이 부서진다고 생태만 고집할 게 아니라 값이 훨씬 싼 동태는 곧바로 얼려서 해동만 잘 하면 생태못지 않다. ⓒ sigoli 고향
동해를 거슬러 올라 오호츠크해 연안에 머물다가 캄차카반도를 돌고 베링해에 접근하여 다시 밑으로 내려오는 명태는 난류에서만 얼쩡거리던 뭇 생선과는 맛이 천양지차다. 찬물에 길들여진 고기가 찬바람에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이렇듯 캘리포니아 해역에 이르는 날짜변경선 양쪽이 원산지인 명태(明太)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생물을 생태(生太)라 하고 얼린 걸 동태(凍太)라 한다. 황태(黃太)는 덕장에서 기화(氣化) 과정과 얼고 녹기를 수회 반복해 노랗게 발효된 것이다. 코다리는 반쯤 말려 졸여 먹는 것이고 북어(北魚)는 글자 그대로 북쪽해역 즉, 북태평양에서 나는 생선이라는 뜻이다.

건태(乾太)는 황태나 진배없지만 정성이 꽤나 생략된 덜떨어진 맨송맨송한 맛이다. 노가리는 명태 새끼를 이르는데 요즘엔 말린 명태 새끼로 바뀌었다. 수입산은 그 작은 대가리를 무슨 명목으로 잘라버렸는지 우리들 추억의 맛을 앗아갔으니 맥주집에서마저 인기가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

머리가 붙어 있는 노가리가 맛있다.
머리가 붙어 있는 노가리가 맛있다. ⓒ sigoli 고향
대학 시절 승우라는 친구는 어디서 배웠는지 첫 모꼬지 때 "쫙쫙 찢어질지라도~나는 그대의 안주가 되어도 좋소"라며 "허허허" 웃으며 노래를 끝냈다. 술자리만 있으면 그 노래가 빠지질 않았다. 말미 노랫말은 내게 80년대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은근히 유도하였던 바 그 소굴에서 한 동안 빠져 나오지 못하게도 했다.

마침 요 며칠 새 발을 동동 구르게 하고 볼과 귀가 떨어져 나갈 듯 춥다. 치가 떨린다. 수은주가 곤두박질쳐서 추워 죽겠는데 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오로지 절절 끓는 집으로만 기어들어가고 싶다.

집안에선 청국장이나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으며 사람 발길 잠시도 멈추지 않도록 끌어간다. 뭔가는 끓고 있어야 들어가고 싶은 맘이 생기는데 국민생선 고등어가 제아무리 맛있다 한들 비린내가 덜한 동태 한 마리를 따라올까.

냉이국이나 동태국 등 국엔 얇게 썰기보다 저미듯 쳐서 넣으면 잠깐만 끓여도 좋다.
냉이국이나 동태국 등 국엔 얇게 썰기보다 저미듯 쳐서 넣으면 잠깐만 끓여도 좋다. ⓒ sigoli 고향
세찬 바람이 사람을 한쪽으로 쓸어가고 귓불이 떨어져 나가도 다른 데는 몰라도 시장 통에 한번 들렀다 가고 싶다. 낮 기온마저 영하로 떨어지는 데엔 장사가 없질 않던가. 국물과 단백질로 잔뜩 움츠렸던 몸에 생기가 돌게 하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좋아하지 않겠는가.

후루룩 먹어치우던 우리들 고깃국이 그립다. 식구가 서넛이라면 한 마리면 족하고 대여섯이면 한 마리만 더하면 너끈하다. 토막토막 동태를 자르는 생선장수의 손놀림과 손님인 내 발 구름 박자가 척척 맞다. 발끝으로 재촉을 하니 금방 탁탁 쳐서 쓸개 빼고 봉지에 담아준다. 달큰한 가을무 한 뿌리 사서 털레털레 걸음 재촉하면 사랑스러운 가족이 기다리고 있을 게다.

대가리도 국물엔 최고니 절대 빠트리지 말자. 머리엔 아가미와 혀, 골이 들어 있으니 국물을 맑게 낸다고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내장도 중요하지만 실제 진한 국물을 먹고 싶으면 같이 넣고 푹 삶아내야 한다.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는 집안 제일 어른이 쏙쏙 소리를 내며 빨아먹다가 눈알은 아이에게 추억으로 물려준다.

동태머리를 다져서 꼭 깍두기를 담가보기 바란다. 정말이지 시원하고 깔끔하다.
동태머리를 다져서 꼭 깍두기를 담가보기 바란다. 정말이지 시원하고 깔끔하다. ⓒ sigoli 고향
그뿐인가. 국물 맛을 약간 포기하고서 동태 대가리를 한 개 두 개 모으다가 서너 개가 되면 시어져가는 김장김치가 물릴 때이니 이 때를 잡아 입맛을 확 당길 깍두기 하나 만드는 거다. 묵직한 무쇠 칼에 큰 도마를 받히고 난도질을 하면 차돌 같이 하얀 관자놀이가 톡 볼가져 나오매 과감히 버리고 속도를 더하여 자근자근 두들기면 머리 형체는 사라지고 육수가 듬뿍 밴 생 젓갈이 만들어진다.

아가미와 눈알, 턱과 껍질, 뼈가 고루 섞인다. 넓게 펴지면 칼날로 쭉쭉 모아 두어 번 더 쪼아주면 웬만한 뼈도 바스라진다. 이걸 끓이든지 생으로 하여 그냥 체에 밭이든지 상관없다. 큼지막하게 일정하게 사각으로 썬 무에 갖은 양념과 고춧가루를 버무려 한데에 두면 밤새 설컹설컹 얼면서 맛이 드니 이보다 시원하고 깔끔하여 입맛을 사로잡는 깍두기는 여태 먹어보질 않았다.

국물에는 될 수 있으면 쌀뜨물을 붓고 끓여야 제맛이 난다. 된장국, 동태국, 김칫국도 마찬가지인데 식당에서 김치찌개에 떡 가루 서너 개를 넣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물에는 될 수 있으면 쌀뜨물을 붓고 끓여야 제맛이 난다. 된장국, 동태국, 김칫국도 마찬가지인데 식당에서 김치찌개에 떡 가루 서너 개를 넣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sigoli 고향
대가리 바로 아래 덩어리에 붙은 쓸개는 이미 시장 쓰레기통에 있을 테니 걱정 붙들어 매고 그것이 창자, 내장, 애인들 구분하지 말고 쌀뜨물을 세 번째에 받아 한번 비린내를 가시게 한다. 창자나 내장이나 그것이 그것이고 '애가 탄다'고 하는 애는 뼈와 살을 제외한 내용물을 이를 뿐이다.

다만 미리 곤이(鯤鮞)가 생선 뱃속에 있는 알을 뜻하고 '이리'는 정확한 한자가 나와 있질 않으나 추측컨대 사투리로 흔히 '속창알이'나 '속창시'라 하는 야들야들한 라면면발이나 동물 골을 닮은 것쯤으로 짐작하고 이리(裏鮞)로 한다 치자. 이쯤 알아두면 둘을 헷갈릴 일은 아니다.

요것저것 있는 고깃덩어리를 각자 두 번은 떠먹는다 가정하고 푸짐하게 끓여보자. 뜨물이 한번 비린내를 제거했으니 생강을 맛보이기만 하고 마늘과 양파 약간만 넣고 솥뚜껑이 들썩거릴 정도로 마구 끓이면 된다.

이보다  더 굵게 절구에 대충 빻은 끝물 고춧가루는 풋풋하고 알큰하다.
이보다 더 굵게 절구에 대충 빻은 끝물 고춧가루는 풋풋하고 알큰하다. ⓒ sigoli 고향
맛을 더한다고 잡것들을 넣어서는 곤란하다. 웬만한 건 물리치고 제들끼리 알아서 끓는 동안 대파 엇비슷하게 썰어 그릇에 담고 널찍한 양푼에 겉흙 씻고 껍질 득득 긁은 하얀 속살만 있는 무수염뿌리 쪽을 한손에 움켜잡고 칼로 착착 칠 준비를 한다.

무를 얇게 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 뿌리 한 개를 통째 들고서 저미듯 준비된 그릇에 살짝 얇게 뻐서(쳐서) 막판에 국물이 시원하게만 조금 넣으면 된다. 굳이 이렇게 흔치 않는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얇게 썬들 제 맛이 나지 않은 까닭은 두께가 약간씩 달라야만 잘 익은 쪽과 설컹설컹 익어가는 맛의 차이를 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센 불에 웬만큼 끓었다 싶으면 불순물을 국자로 몇 번 떠내고 준비해 둔 무를 넣고 2~3분만 마저 끓이다가 말라가는 썬 대파만 넣고 굵은소금-천일염으로 최종 간을 보면 뽀얀 동태국이 완성된다.

밥을 푸고 소금종지와 김치 한 가지면 더 바랄 게 없다. 후후 불며 국물을 한번 떠서 시원하게 속풀이를 하고 풀어지기 전에 이리를 '후루룩 훕' 국물 속에서 훔치듯 젓가락질을 서둘러보자. 이어 제법 큰 알 덩어리, 곤이를 씹으면 수많은 포자가 드글드글 터지는 감흥을 맛보리라.

동태머리는 누구 차지일까? 간혹 아이들이 이걸 먹겠다고 하다가 목에 가시가 걸리면 물보다도 김치에 밥을 싸서 한두번 씹고 넘기도록 하면 말끔히 청소된다.
동태머리는 누구 차지일까? 간혹 아이들이 이걸 먹겠다고 하다가 목에 가시가 걸리면 물보다도 김치에 밥을 싸서 한두번 씹고 넘기도록 하면 말끔히 청소된다. ⓒ sigoli 고향
여기까지 먹고도 아쉬우면 예전엔, 익다만 뽈그족족하고 푸르스름한 끝물고추를 절구에 대강 푹푹 찧은 고춧가루를 풀어서 매콤하고 풋풋한 맛을 더하여 먹었다. 처음부터 넣고 끓인 국물에 비견하지 못할 깔끔하고 시원하며 알싸하고 매콤한 맛만 추린 환상의 맛이었다.

무까지 넣었으니 국물이 텁텁하지 않고 맑고 순수하다. 열댓 소년소녀 살갗처럼 뽀얗다. 흰쌀밥을 한 그릇 모두 말지 말고 두어 숟가락만 말아 살코기와 함께 국물이 식기 전에 허겁지겁 떠먹고 다시 떠먹어야 마지막 남은 생선비린내가 덜하다. 아직 국솥엔 잔불이 타고 있다. 주방 가까운 쪽에 사람을 교대로 앉혀놓으면 골고루 맛있는 한 끼를 함께 할 수 있다.

밥 한 그릇에 솔솔 밀려들어오는 바깥바람도 두렵지 않게 땀을 한번 쪽 쏟고 나면 정말이지 피로가 말끔히 가신다. 한껏 든든하게 배부르지만 쉬 꺼지고 마니 영양 듬뿍, 소화 걱정 끝이다. 밥상 위에 나뒹구는 동태 가시 치울 일만 남았구나. 이 맛에 우린 날씨가 추워도 별 상관없는 건가. 오늘 저녁에도 맑은 동태국이다.

머리 하나를 먹었더니 이렇게 많은 가시가 나온다. 하얀 차돌맹이처럼 생긴 것이 관자놀이다.
머리 하나를 먹었더니 이렇게 많은 가시가 나온다. 하얀 차돌맹이처럼 생긴 것이 관자놀이다. ⓒ sigoli 고향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이달 30일에 고향느낌이 풀풀 나는 인터넷고향신문 시골아이 고향을 만들기 위해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 www.sigoli.com에는 그리운 고향 추억과 어머니손맛, 팔도맛지도, 여행스케치, 장난감박물관, 생활사박물관, 귀향은행, 생산이력이 확인된 최우수 농수산물과 고향일꾼을 잔잔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살아있는 전통을 발굴하여 널리 소개하고 도농교류에 앞장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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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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