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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겨울산은 비우는 곳입니다
비워서 바람을 채우고
다시 굳은 몸을 풀어 춤추고
메마른 떡갈나무 잎이 춤추는 곳입니다

숨은 새도 다 날아간 산에
햇빛은 거기 와서 별 볼일이 없습니다.
벌레들은 죽고 절벽은 더욱 무너져
혹은 생명과 부활과 믿음까지 꺼져
구름은 거기 와서 별 볼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참으로 쓸쓸한 겨울산은
우리들의 한계가 아닙니다
비로소 완전한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 안수환, 겨울산 중 일부분


ⓒ 이기원

ⓒ 이기원
쓸쓸한 겨울 산이지만 양지 바른 길에는 말끔하게 눈도 녹아 있습니다. 사진 속 풍경만으로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늦가을 정취인양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길 위에 서서 느끼는 바람에는 여전히 날이 서 있습니다.

ⓒ 이기원
찬 바람 부는 겨울 산에도 따스함은 남아 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 따라 날아가 새 터전을 찾아야 할 풀씨가 아직도 꽃받침에 붙어 있습니다. 저를 키워준 꽃받침도 허옇게 변해 마른 줄기 끝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데 질긴 정을 떼어내지 못했습니다. 꽃받침도 줄기도 말라버렸지만 솜털 매단 풀씨는 솜털보다 눈부신 생명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 이기원
풀씨가 남아 있기는 억새풀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랗게 서서 흔들리는 억새풀 위로 가을처럼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펼쳐 있습니다. 날선 바람 따라 흔들리는 억새풀의 모습이 사시나무처럼 춥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한겨울 날선 바람 속에서도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는 미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기원
승지봉 넘어 운암정 도달하기 전에 의자가 하나 있습니다. 단풍 곱게 지던 가을날이면 다정한 사람과 함께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면 좋겠다 싶은 의자입니다. 겨울철 날선 바람 때문에 찾은 사람 없어 빈 의자입니다. 자신을 비우지 못한 사내는 빈 의자만 보면 문득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이기원
운암정은 모진 가난을 딛고 일어서 수백 석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지주로 성장한 두 인물이 자신들의 입지를 기념하기 위해서 1937년 세운 정자라고 합니다.

'근면과 성실로 재산을 모아 사회에 이바지한 공'이 높다며 운암정의 주인공들을 기리자고 하지만 그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만은 않습니다. 일제시대 정자를 지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지주는 어떻게 사회에 기여했을까요?

제 몸으로 키워낸 잎을 모두 버리고 겨울을 나는 나무에 둘러싸인 운암정은 말없이 오랜 세월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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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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