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산과 마찬가지로 월악산을 오르는 길도 여러 갈래다. 나는 덕주사쪽의 길로 올랐다. 초입에선 아직 단풍이 그 고운 자태를 마음껏 자랑하고 있었다.
계곡은 원래 물의 차지였지만 가을엔 낙엽의 자리이기도 하다.
잎은 갔지만 감은 남았다. 곧 감도 갈 것이다. 잎과 감은 모두 가기 전에 아름다운 색과 달콤한 맛을 남긴다. 마지막 갈 때 나의 삶도 그럴 수 있을까.
이제는 산에 가면 종종 나무들이 모두 제 이름자를 쓴 명찰을 목에 걸고 우리는 맞곤 한다. 어디 그 뿐이랴. 명찰과 함께 자세한 신상 명세까지 곁들인다. 이름도 알고 신상도 알게 되니 좋기는 한데 개인 정보를 이렇게 만천하에 공개해도 되는 걸까.
원래 높이 오르면 멀리 보이는 법이지만 아울러 하늘이 맑아야 한다. 말하자면 시선이 멀리 가려면 '높이'와 '맑음'이란 두 가지 날개를 동시에 필요로 한다. 날이 흐려 높이의 날개 하나만으로 날아간 나의 시선은 그다지 멀리가지는 못했다. 내려다보이는 곳은 충주호이다.
흐린 하늘의 틈새를 비집고 갑자기 한줄기 빛이 내려오더니 봉우리 하나를 환히 밝혀주었다. 옆에 있던 분이 빛이 밝힌 봉우리가 바로 월악산의 정상인 영봉이라고 일러주었다. 빛으로 길안내를 받는 기분은 아주 신비로웠다.
이제 월악산에서 더 이상 오를 곳은 없다. 여기는 월악산의 정상 영봉이다.
내려다보니 산은 대지의 등줄기이다. 위쪽이 등줄기면 우리가 사는 아래쪽은 그 품이 될 것이다. 우리는 대지의 품에 산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하늘이 튿어진 구름의 틈새로 빛을 쏟아냈다. 구경났다고 산의 나무들이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내가 가졌던 높이는 달이 대신하고 숲엔 어둠이 찾아들었다. 까만 윤곽으로 하늘과의 경계선을 그은 나무 위로 뜬 반달은 떠나는 내게 있어 월악산의 마지막 배웅이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