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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 피로는 역시 가장 좋은 수면제 역할을 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몇 시간은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새벽 여섯 시 반, 하늘에 붉은 기운이 잠시 비치는가 했더니 이내 사그라들었다. 날이 밝기를 고대했는데 간밤에 몰려온 구름은 산을 송두리째 뒤덮고 말았다. 산은 어제의 찬란한 빛을 완전히 감춘 채 짙은 장막 속에 몸을 숨겼다.

오늘 걸을 길은 뱀사골 대피소에서 장터목 대피소까지 18.5km. 내 걸음으로는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이었다. 능선을 따라 이어진 종주 코스라서 길이 그다지 험하진 않지만, 찌푸린 날씨는 산행의 즐거움을 반감 시키기 마련이다.

가을의 운무는 여름과 또 달랐다. 안개에 젖은 신비한 여름 숲속을 습한 공기를 허파 가득 들이마시며 따라갈 때의 낭만과는 딴판으로 가을의 운무는 스산한 느낌을 줄 뿐이었다. 이렇게 흐린 날에는 동행이 필요하다.

▲ 날은 흐리고
ⓒ 김비아
앞서거니 뒷서거니 길에서 계속 마주치던 우리 세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함께 걷고 있었다. 나보다 어린 친구는 지리산을 처음 찾은 대학생이었고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친구는 이 산을 육십 번이나 종주한 지리산 마니아였다. 솜씨 좋은 그이 덕택에 나는 벽소령에서 점심으로 맛있는 찌개를 대접 받았다.

그래픽 디자인 일을 했다는 그는 자신이 프리랜서인 줄 알았는데, 요즘은 일거리가 전혀 없어서 졸지에 백수 신세라며 조용히 웃는다. 이 산에 그토록 자주 온 까닭을 물으려다 말았다. 이 산보다 더 좋은 답변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산은 언제나 우리의 언어보다 나은 대답을 들려주곤 하니까.

▲ 가을의 운무 속을 걷다
ⓒ 김비아
많고 많은 산 중에서 특히 지리산에 반하는 이들이 많은 까닭은 어쩌면 산 속에서 하룻밤 또는 며칠을 보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산에서 하루 해가 저무는 모습과 새 하루가 시작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다른 어떤 산보다 이 산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느끼게 된다.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간 거리만큼 그에게 더한 애정을 갖게 되듯이, 이 산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 산의 숨결과 향취를 더욱 그리워하게 되나 보다.

오후 들어서는 비까지 뿌리기 시작했다. 바람도 점점 세차가 불어닥쳤다. 나도 걸음이 처졌고 지쳐갔다. 장터목까지 가려던 많은 이들이 악화된 기상 조건 때문에 세석에서 하루의 산행을 마감했다.

나 역시 잠시 고민했지만 산의 날씨는 시시각각 달라지기에 일단 계획했던 대로 장터목까지 가기로 했다. 세석에 자리를 예약한 어린 친구와 헤어져 우리는 장터목으로 향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저 목적지를 향해 터벅터벅 걷기만 해야 했던 마지막 한 시간은 퍽 힘들었다. 혼자였다면 결코 저녁까지 그곳에 당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걸음은 더 느려졌을 테고 아마 나는 세석쯤에서 밤을 맞이했을 것이다.

산길을 걷는 것이 어쩜 이리 삶의 여로와 닮았을까. 화창한 날엔 홀로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그러나 비 오고 바람 불고 추운 날엔 동행이 필요하다. 같은 길을 가는 벗들 덕택에 우리는 그 길을 더욱 안전하게 그리고 끝까지 마칠 수 있는 것이다.

저녁 다섯 시 반, 안개가 얼마나 짙은지 장터목 대피소는 바로 앞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전등불 하나만 안개 속에서 희미한 빛을 내뿜으며 대피소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었다. 종일 무리했던 나는 속이 안 좋아 밥도 몇 술 못 뜨고는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 천왕봉 주변의 고사목
ⓒ 김비아
다음 날, 천왕봉 일출 시간은 여섯 시 삼십 분.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는 넉넉잡아 한 시간이다. 원래 나는 푹 잔 다음에 아침을 들지 않고 바로 길을 나서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 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새벽 세 시 반부터 방의 불을 켜고 시끄럽게 떠들며 소란을 떠는 바람에 네 시가 좀 넘어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다.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막무가내의 배짱을 적어도 산에서만큼은 보고 싶지 않다. 밖으로 나가니 하늘에는 구름 사이로 별들이 반짝였다. 혹시나 일출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짜증스러운 마음이 죄다 가셔졌다.

아침을 지어 먹고 숱하게 온 익숙한 길에 접어든다. 안개는 더욱 짙어져서 별과 달은 그만 자취를 감추었다. 해를 맞이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였다.

제석봉을 지날 때는 다행히 바람이 강하지 않았는데 천왕봉에 이르니 찬바람이 마구 뺨을 때린다. 주위는 서리가 가득 내려앉아 이미 겨울에 와 있었다. 날리는 눈바람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하얗게 만들었다. 주위 사람들이 내 눈썹과 속눈썹도 하얗게 세었다며 웃는다.

강추위 속에 벌벌 떨며 기다렸지만 하늘의 움직임에는 변화가 없었다. 천왕봉 일출을 한번도 못 본 나는 아마도 지은 죄가 많은 모양이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항상 내가 오기 전날이나 바로 다음날에 온 사람들은 꼭 일출을 보길래 하는 말이다. 하늘이 하는 일, 아쉽지만 어찌하랴.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떼지어 나타났는데, 어느 회사에서 200명 가까이 되는 직원들이 이 새벽에 올라왔다고 했다. 이 역시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한 사람이 스무 번 오는 것보다 스무 명이 한 번 오는 것이 자연이 훨씬 더 훼손된다고 들었다. 200명이 한꺼번에 밟고 지나간 땅은 예전 상태로 회복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 제석봉에서
ⓒ 김비아
추위 때문에 더 견디지 못하고 나는 서둘러 하산했다. 그 바람에 전날 동행한 이와 인사도 못 나누고 헤어졌다. 천왕봉에 사람이 원체 많아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 잠시 스쳐간 인연이지만 그의 친절이 고운 향기로 남는다.

좀 내려오니 바람이 한결 잠잠해서 살 것 같았다. 간밤 내린 비가 얼어 하얗게 변한 제석봉은 운치가 있었다. 이곳은 언제나 약간은 거칠고 황량한 곳이었는데 안개와 눈에 쌓여 고요하게 피어난 모습은 고적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장터목 대피소에 돌아와 몸을 녹이며 휴식을 취했다. 날씨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백무동으로 바로 하산하기로 했다. 내려가는 길은 찬 겨울 속에 잠겨 있었고,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단풍이 그리 고울 수가 없었다.

▲ 길은 가을에서 겨울로
ⓒ 김비아
▲ 서리 속의 단풍은 더욱 곱게 느껴진다
ⓒ 김비아
▲ 설화가 핀 고요한 숲길
ⓒ 김비아
한 삼사십 분쯤 내려갔을까. 몰아치던 바람이 삽시간에 구름을 흩어 버리면서 그 아래 눈 덮인 산들의 자태가 환히 드러났다.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춰 선다. 바람이 드디어 방향을 바꾼 것이다.

북서풍이 한번씩 몰아칠 때마다 산은 구름에 가리워졌다 다시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산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사람들은 반가움에 들떠 너나 없이 소리치며 환호한다. 바람은 우리에게 감히 기대치도 못했던 선물을 안겨준 것이다. 푸른 하늘, 빛나는 햇살, 그리고 간밤의 긴 침묵을 깨고 하얗게 어깨를 드러낸 가을산을. 다들 놀라고 감동해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 구름이 사라지고
ⓒ 김비아
▲ 새아침이 시작되다
ⓒ 김비아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침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었다. 바람은 계속 힘차게 불어와 남은 구름을 마저 날려보내고 있었다. 내내 어둡다가 이제야 환하게 웃는 가을산의 표정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낙원이 바로 여기구나 했다. 빛으로 가득찬 신천지. 그가 부르는 소리를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나는 방향을 바꾸어 왔던 길을 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10월 20~22일에 지리산을 걸었습니다. 세 번에 나누어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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