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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 피어오르는 남한강의 아침
물안개 피어오르는 남한강의 아침 ⓒ 김선호
세시간 정도 달려 충북 단양에 닿는다. 산행에 앞서 물안개 피어오르는 남한강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아침을 지어 먹었다. 보글보글 김치찌개를 끓여 놓으니 아이들도 밥 한 그릇을 달게 비운다.

소백산국립공원 매표소에 도착해 시간을 확인하니 열시하고도 삼십분이다. 산 정상은 추울거라서 챙긴 두꺼운 옷들로 배낭이 잔뜩 부풀었다. 서둘러야 하는데 아이들이 어느 샌가 옆으로 샜다. 공원 한쪽에 황토자갈길을 조성해 놓았는데 아이들이 그걸 본 것이다. 작은 구슬 같은 황토알갱이들이 발바닥을 간질이는 느낌이 좋은지 깔깔대며 나오려 하지 않는다.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설치해 놓은 황토자갈길은 그러나 매우 위험해 보였다. 완두콩만한 알갱이들이 깔린 바닥 아래는 보도블록이 드러나 보였고 그런 곳은 매우 미끄러웠다. 여차하면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질 판이었다.

소백산 국립공원 북부사무소 주변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정하다. '잔디보호' 팻말이 쓰인 공원도, 공원 앞에 심은 한창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행렬도, 단정하기 그지없다. 단정함이 지나쳐 오히려 풍경이 낯설게 보인다. 또 산으로 오르는 길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포장도로가 길었다.

부드럽게 밟혀 오는 흙길 대신 시멘트 포장길을 걸으며 '좋은 길 메우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투덜대는데 길 아래쪽에서 우렁찬 계곡물 소리가 들려온다. 천동리에서 비로봉을 오르는 첫 비경인 '다리안폭포'다. 폭포 이름이 순하고 참 예뻐서 포장된 산길에 대한 불만도 한순간에 사라지는 느낌이다. 계곡 근처 바위를 타고 담쟁이 넝쿨이 빨갛게 단풍 든 모습도 예쁘다. 그러나 산길 초입은 단풍보다는 초록잎이 더 많아 보인다.

신선교를 지나서
신선교를 지나서 ⓒ 김선호
계곡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넌다. 천동 1·2교, 신선1·2교, 다래1·2교…. 다리마다 쓰인 이름을 불러주며 아이들이 산길을 걷는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으로 계속되고 포장길이 끝난 곳부터 돌길이 이어진다. 딱딱한 돌길을 걷는 산행이 쉽지가 않다. 가쁜 숨을 내쉬며 겨우 겨우 길만 보며 나아간다.

발아래 소나무 잔가지가 수북이 쌓여 있어 비로소 주변을 살피면 소나무와 일본잎깔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신갈나무 마른 잎이 발길에 채여 눈을 들어 바라보면 그곳이 참나무 군락을 이루고 있기도 했다. 잠시 쉬어 갔으면 싶은 곳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것 같은 너른 바위가 보인다. '신선바위'다.

다리 쉼을 하기에 좋은 신선바위
다리 쉼을 하기에 좋은 신선바위 ⓒ 김선호
신선바위에 앉아 다리쉼을 하며 주변을 살핀다. 차고 맑은 공기가 주변을 감싸고 하늘은 파랗게 펼쳐져 산행하기 좋은 날이다. 눈앞에 자작나무 한 그루가 서서 햇살을 받고 있다. 가지를 다 덮을 듯 풍성한 잎새들이 노랗게 흔들린다. 자작나무의 하얀 수피가 샛노란 나뭇잎으로 더욱 하얗게 반짝이는 듯 보인다.

자주 산을 다니면서 아이들도 나름대로 지키는 규칙은, 산행 코스를 확인하고 오르되 중도에 그만 가자고 조르지 않기다. '다리가 아프다'면서도 걷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저만큼 엄마를 앞서가는 아이들이 오늘따라 더 대견해 보인다.

천동리에서 계곡을 따라 비로봉을 오르는 소백산 코스는 유난히 돌이 많다. 그런 탓인지 숲이 울창한 느낌이 적지만 생강나무, 고로쇠나무는 노란 단풍으로 예쁘고 , 붉나무 당단풍나무는 빨간 단풍잎이 곱다.

천동리에서 비로봉 가는 길에는 돌길이 많다.
천동리에서 비로봉 가는 길에는 돌길이 많다. ⓒ 김선호
산길을 오르느라 입고 온 옷을 하나씩 벗어 배낭에 넣고 가벼운 옷차림이 되어 마지막휴게소인 천동야영장에 들어서니 그때서야 오싹 한기가 느껴진다. 해발 1190미터 지점이다. 그곳의 날씨는 이미 초겨울이어서 잠시만 쉬고 있어도 금방 추위가 느껴질 정도다. 휴게소에서 파는 따끈한 어묵으로 몸을 덥히고 다시 산길을 오른다.

산행 초입부터 완만한 가파름으로 이어진 산길이 야영장 이후부터 가파름이 더욱 급해진다. 야영장에서 300미터 정도 오르다 '소백산 옹달샘'을 만났다. 00약수 대신에 산의 이름을 앞세운 '옹달샘'이라는 명칭이 정겹다. 오목한 바위틈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 샘은 옹달샘이라는 이름에 잘 맞아 보였다. 샘물을 한 모금 들이켜니 적당히 시원한 게 물이 달고 맛있다.

그 이름만큼이나 정다운 소백산 옹달샘
그 이름만큼이나 정다운 소백산 옹달샘 ⓒ 김선호
산을 오르는 기쁨 중 하나는 그처럼 우연히 옹달샘을 만나 달고 시원한 샘물을 들이켤 때다. 내쳐 오르는 산길은 경사면이 더욱 가파르고 나무계단이 길을 대신한다.

아이가 '천국의 계단'이라고 명명한 길 앞쪽이 시원하게 시야가 트여 주능선이 코앞이고 손을 뻗치면 닿을 듯한 하늘이 파랗게 펼쳐져 있었다. 비로봉에 거의 다다른 지점에서 걸어온 길을 가늠해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아, 거기 겹겹이 에워싼 산과 산이 물결치듯 이어진 장엄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비로봉 정상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보다 눈앞에 펼쳐진 장엄한 산 능선이 오히려 감격적이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산능선이 마치 사막 같다는 아이들 표현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봉 오름길에서 바라본 산능선
비로봉 오름길에서 바라본 산능선 ⓒ 김선호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분다. 배낭에 쑤셔 넣었던 옷을 하나씩 꺼내 입고 다시 산길을 오른다. 산길은 이미 잎을 떨군 거제수나무, 사스레나무, 신갈나무들로 휑한 느낌이다. '눈이다!' 아이들의 호들갑에 설마하고 들여다보니 산죽 아래 눈이 하얗게 덮여 있다. 위로 오를수록 눈이 점점 더 많이 보이더니 연화봉 갈림길을 얼마 앞두고 아예 설원이 펼쳐진다.

이게 어인 행운인가 하고 아이들은 눈밭으로 뛰어들었다. 입에 넣어도 보고 숲길을 겨우 덮을까 말까한 눈을 굴려 작은 눈사람도 만들어 자랑하는 아이들은 추위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마냥 행복해 보인다. 소백산 정상에서 몰려오는 바람은 점점 강해지고 그만 가자는 말에도 움직일 줄 모르던 아이들도 거세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손을 털고 따라 나선다.

소백산에 내린 첫눈
소백산에 내린 첫눈 ⓒ 김선호
연화봉 갈림길에 올라 보니 올라온 반대쪽은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고 있고 눈의 흔적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어 대조적이다. 비로봉을 앞에 두고 연화봉 갈림길에서 멀리 소백산천문대가 바라보이는 곳에 모여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햇살이 기분 좋게 내리고 있었다.

배낭을 정리하면서 옷이란 옷을 모조리 꺼내 입고 비로봉을 향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바람에 실려 날아갈 것 같은 바람이 정면에서 불어온다. 한겨울이라도 그렇게 춥지 않을 듯싶은 추위로 몸이 얼어 버릴 것 같다. 풀들이 바람에 순응하듯 바람이 지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바싹 마른 풀잎들은 그래도 강인한 뿌리에서 조금도 비켜서지 않을 태세다. 바람이 너무 강한 탓인지 비로봉 정상 주변에는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바람에 순응하는 마른풀잎들만 무성할 뿐이다.

저 아래 철조망으로 보호하고 있는 주목군락이 보인다. 정상을 바라보고 있는 주목은 모진 바람에도 당당하고 의연하다. (천연기념물 244호, 총 본수 3798본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주목 군락지) 반쯤 고개를 수그리고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바람을 뚫고 비로봉을 향해 한발 한발 걷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어질듯 이어진다. 그들 중엔 예닐곱 살로 보이는 아이 손을 잡고 가는 이도 있다.

바람과 맞서 비로봉을 향하는 길
바람과 맞서 비로봉을 향하는 길 ⓒ 김선호
어느 젊은 아버지는 이제 갓 백일을 넘겼을 법한 아기를 품안에 안은 채 비로봉으로 향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압도하던 산은 사람이 빚어낸 풍경으로 숭고함까지 더하는 듯싶었다. 마침내, 비로봉 정상에 섰다. 정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의 감격스러움은 그 어떤 산보다 특별했다.

비로봉 정상은 바람의 정점에 있었다. 비로봉(1439미터) 표지석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등산객들이 얼른 한 계단 아래로 내려선다. 바람 반대 방향으로 내려서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소백산의 바람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애초 계획대로 라면 국망봉까지는 가야 했지만 바람이 예상외로 거세니 쉬운 일이 아니다. 잠시 망설이던 남편이 가는 데까지 가보겠다니 아들 아이가 뒤따른다. 가만 서 있으면 더 추울 것 같아 딸아이 손을 잡고 국망봉을 향해 걷는다.

비로봉 정상에 서다
비로봉 정상에 서다 ⓒ 김선호
그렇게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마른 풀잎들만 바람에 쓸리는 그곳에 떡 하나 바위가 덩그맣게 서 있어 바람을 피하기 좋은 곳이 있었다. 잠시 바람을 피하면서 더 이상 진전은 불가능할 것 같다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바람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비로봉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한그루 진달래를 만났다. 온통 낮은 키의 풀들만의 세상에서 진달래 한 그루는 겨울눈을 만드는 중이었다. 보송한 솜털이 유난히 두꺼운 게 겨울을 날 채비를 단단히 해둔 모양이다. 틀림없이 이 진달래는 그 어떤 진달래보다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리라.

뜻밖의 눈을 만나 지체되고 바람이 가로 막는 바람에 계획한 만큼 산행을 다 마치지 못했지만 참으로 뿌듯한 산행이었다. '이렇게 바람이 많으니 소백산은 여름에 오면 좋겠다' 아이들의 바람대로 내년 여름을 기약하며 온 길을 되짚어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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