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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정착한 지 벌써 반 년이 지났습니다. 좌충우돌 부딪치며 하루하루 바쁘게 살다보니 시간 가는 것도 잊고 살아온 듯합니다. 홍콩에 오기 전 크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적당한 해방감과 낯선 생활이 주는 신선함 등이 삶에 활력소가 되면서 생각보다 외국생활에 재미를 느끼면서 잘 살아온 것도 같구요. 하지만 문득 문득 외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술 한 잔 마시면서 추억을 얘기하고 싶을 때, 재잘재잘 '한국어'로 마음껏 수다 떨고 싶을 때, 홍콩에서는 흔히 먹을 수 없는 한국 음식을 먹고 싶을 때 특히나 외롭습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서글플 때는 아플 때입니다.
홍콩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독한 감기 몸살로 꼼짝을 못할 정도로 아픈 적이 있었습니다. 남편도 해외 출장 중이라서 꼼짝 없이 혼자 앓아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가뜩이나 비싼 홍콩의 병원비(한 번 진료에 2만5000원 가량)를 아끼느라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툰 영어로 손짓 발짓 해 가면서 의사에게 증상을 호소하고 며칠 분 약을 받아 터덜터덜 집으로 오는 길에 왜 그렇게 눈물이 왈칵 나던지요.
'오늘 저녁 아이 저녁은 어떻게 차려주나? 내일 아침은 어떻게 하나?' 일가친척이나 친구라도 있으면 좀 부탁을 하련만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이 유치원에서 만난, 당시로서는 별로 친분이 없는 일본 아줌마 몇 명이 고작이었으니까요.
집에 돌아와 도저히 저녁밥을 지을 기력이 나지 않아 그냥 아이와 식빵 한 조각으로 저녁을 해결하려던 즈음 전화벨이 울리더군요. 아파트 옆 동에 사는 메구미씨였습니다. 안나(딸)와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일본 엄마들 가운데 비교적 친하게 지내는 아줌마입니다.
아침에 유치원에 아이를 데려다주면서 잠시 인사를 나누던 중 제가 몸이 아프단 것을 알게 되었는데, 아픈 기색이 역력한 저를 보고 아마도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었습니다. 식사를 어떻게 했느냐고 묻더니 굳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딸아이와 제 걱정을 하면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차려 가져다준다는 겁니다.
몇 번을 사양했지만 지나친 사양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아파트 현관으로 내려갔더니 쇼핑백 가득하게 '한 상'을 차려왔더군요. 사실 대단한 메뉴는 없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일본의 가정식 상차림이었습니다.
감자와 야채를 간장에 넣어 조린 반찬, 일본 된장에 미역을 넣어 끓인 된장미역국, 프라이팬에 볶은 어묵, 옥수수와 야채 버터 볶음, 여기에 피로회복에 좋다면서 우메보시(일식 매실 절임) 한 조각까지 넣었구요. 디저트로 사과 한 알까지 챙겨 넣는 세심한 마음 씀씀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처음에 보따리를 풀어보고는 입맛이 확 돌면서 갑자기 식욕이 당겨 그냥 먹어치우려다가 친구의 정성과 배려가 너무 고마워서 오랫동안 기념으로 남겨두려고 배고프다는 아이를 달래가며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배부르게 잘 먹은 것은 물론이구요.
정말 아쉬운 것은, 쇼핑백을 건네받으며 "진심으로 고맙다. 정말 나중에 신세를 꼭 갚겠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다" 이런 말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말이 통해야 말이죠.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입을 떼어보았자 나오는 말이라고는 '땡큐, 아리가도 고자이마스'가 고작인걸요. 그 때 만큼이나 제 빈약한 어학실력이 창피하고 후회된 적도 없을 겁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받은 내 마음을 저 이에게 보여주려면 어떤 말이 좋을까?" 내심 고민하다가 퍼뜩 든 생각에, 집으로 돌아가는 메구미씨를 쫓아가 건넨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날도 짧은 영어와 더 짧은 일본어를 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영어를 잘 못하는 그녀와 일본어를 전혀 못하는 제가 의사 소통을 하는 방법입니다.)
"we가(が) stranger 데스까(ですか)?"(우리가 남이가?)
그날 그녀는 제가 몇 번 설명을 해 주어도 눈만 껌뻑거릴 뿐 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저도 더 이상 설명하려고 애쓰지도 않았구요. 그래도 상관없었어요. 그저 행복했고 그냥 따뜻한 마음이었으니까요.
국가와 인종을 떠나서,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역시 사람 사이의 가장 중요한 것은 '정(情)과 진심(眞心)'이란 것을 다시금 느낀 날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멋대로 요리' 이효연의 홍콩 이야기 http://blog.empas.com/happymc
몇 달 지난 지금도 솔직히 그녀와 저의 어학실력은 별로 진전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쌓인 우정은 얼마나 도타와졌는지 모릅니다. 사람 살면서 '말'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새삼 느끼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