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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교수가 쓴 글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의 글이 문제가 된 건 순전히 기존 주류와 다른 시각으로 한국전쟁이라는 현상을 설명한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통일을 위한 내전이라는 그의 주장은 확실히 북한 일방의 침략전쟁이라고 주장하는 남한 주류의 시각과 다르다. 곧 같지 않다. 그 같지 않음 때문에 나라가 법석이다.

그 다름 때문에 주류 언론은 펜을 굴리기 시작했고, 자본가는 임노동의 재/생산 과정이 불온하다고 불평하고, 검찰은 그 사건의 수사 과정에 외부의 압력이 존재한다고 엄살떤다. 야당은 한 술 더 떠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폭거라고 야단이다. 그 다름에 대한 주류의 저항은 검찰총장이 사표를 내던짐으로써 절정에 다다랐다.

한나라당의 수사학 '국가정체성'

강정구의 발언이 국가의 안위를 뒤흔들만한 위험성을 내포하는지 여부는 이제 법원이 가릴 것이다. 허나 그건 나의 관심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이 논란을 둘러싼 주류 언어의 수사학이다. 특히 한나라당의 수사학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이 사건과 관련해 "국가정체성"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당지도부와 영남권 의원들은 적극 찬동하는 분위기다. 그들은 이번 사건을 "대한민국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세력과 흔들려는 세력의 싸움"(주호영)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단순히 "강정구 구하기나 총장 거취 문제 차원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걸린 문제"(강재섭)이자, "정권 차원을 넘어서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한 근본 문제"(최연희)이다. 그러므로 확실히 작금의 "국가정체성 논쟁은 소모적이지 않고 건설적"(김기춘)이다.

그들은 "나라의 근본이 너무 흔들리니 결연한 자세로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최병국). 심지어 "천정배 장관의 강정구 교수에 대한 수사지휘권 발동을 비롯한 강 교수와 관련한 일련의 흐름은 현 정권이 주사파 세력과의 연대를 복원하려는 일련의 과정"이라며 "이에 대해 현 정권에게 국가정체성의 문제를 분명히 물어야 한다"(박계동)고 목에 핏대를 세운다.

한나라당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이번 사건은 국가 정체성과 정통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국가의 정통성이 근대의 자아-정체성의 재/생산에 기반해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은 국가 정체성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겠다.

정체성은 차이를 배제하는 배타의 수사학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진정한 자아-정체성은 문학과 예술이 오랫동안 탐구해온 주제다. 오이디푸스의 신화에서 보여지듯 고대 비극은 많은 부분은 정체성의 무지(혹은 혼란)에 기인하며, 괴테와 제임스 조이스 등의 근대 교양소설이 다루는 주제는 자아정체성의 탐구였다.

정체성/동일성은 서구가 고대 형이상학부터 근대 인식론에 이르기까지 로고스-중심적 선언을 위한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특히 종교적 신의 권위가 인간의 이성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르네상스 이후 근대까지 자아-정체성은 중요한 철학적 주제이기도 했다.

근대적 자아는 로고스로 무장하고는 자아동질적인 것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이는 자아동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을 반진리로 배척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로고스는 곧 자아동일적 논리이자 외부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자아로 동일화하는 동시에 사실성의 총체를 자아의 순수시각에서 축적시키는 기제이다.

정체성, identity는 말의 본래의 의미에서 자아와 동일한 존재들과 자아와 다른 존재들 사이를 구분하는 배타적 선긋기다. 정체성이란 자아-동일성의 재생산이다. 그것은 다름, 혹은 차이 difference를 배제하는 배타의 수사학이다. 근대적 자아는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동일성 동질성 정체성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다양성 이질성 차이를 자아의 바깥에 존재하는, 따라서 자아-정체성으로 동일화하고 동질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근대적 자아는 실패한다. 그 실패는 그들 전체 삶을 정체성의 탐구에 바치고 그 정체성을 위해 투쟁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자기동일성에 기반한 국가 정체성, 또는 민족 정체성이 제국주의 국수주의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근대적 자아의 정체성 탐구가 결과한 폭력성과 비극을 반증한다.

이탈리아의 국가적 정체성이 파시즘을, 게르만의 민족 정체성이 나치즘을, 그리고 일본의 국가=민족 정체성이 군국주의를, 백인의 인종적 정체성이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유대인의 종교 정체성이 시오니즘을 결과한다.

정체성의 폭력은 차이의 부정, 혹은 타자성의 자아에로의 동일화하려는 근대의 욕망에 그 뿌리를 둔다. 탈근대의 도전은 헤겔의 "차이의 존재론," 하이데거의 "정체성과 차이," 들뢰즈의 "소수자-되기" 등에서 보여지듯 이성의 역할에 관한 정체성 대 차이, 혹은 동일성 대 다양성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데리다, 정체성의 법칙을 해체하다

1966년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데리다가 "인문과학 담론에서 구조, 기호, 그리고 놀이"를 발표했을 때, 그것은 서구 형이상학의 근본 전제들, 로고스-중심적 선언들을 허물어뜨리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데리다는 철학의 의심할 여지없는 자아-충족적 기반을 찾으려던 데카르트적 프로젝트의 정당성을 거부함으로써 서구 철학 전반에 해체적 비판을 가했다.

데리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형이상학과 서구 사상사의 전통이 지닌 "정체성"의 법칙을 해체하려고 했다. 그는 서구 형이상학의 오류를 지적하기보다는 서구 형이상학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에 천착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차이"였다. 데리다는 정체성의 탐구가 자아-동일적 자아-재생산적 자아-반복적 과정에 불과하다고 일갈하며 그것은 아무런 의미작용을 하지 못하는, 그러므로 아무런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정체성은 하나의 사물에 관한 자아-정체성이 아니다. 정체성 내부에 차이가 존재하며, 그 차이야말로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다. 곧 "외부"의 영향들이 작용하여 "나/우리"를 규정하고 "나/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 광기가 휩쓴 근대역사의 교훈은?

우리는 외부의 영향들에 너무 무지하지 않은가? 타자의 시각에 너무 둔감하지 않은가? 분명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외부/타자의 시선은 남한 주류의 그것과 다르다. 타자의 시선을, 외부의 영향을, 곧 "다름"을 배제하는 정체성 전략은 필연적으로 예를 들어 검찰의 순혈주의와 같은 순수성에의 집착을 드러내기도 한다.

자아동일적 정체성의 확립은 무소불위의 배타적 권력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이데올로그다. 그것은 국가정체성 문제를 제기하는 한나라당의 의도가 위험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체성의 동일성 보편성 필연성을 탐구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할 게 아니라 다양한 담론적 사회적 실천 속에서 작용하는 차이의 타자성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자아동질적 정체성에 기반한 제국주의의 팽창과 전체주의의 광기가 휩쓴 근대의 역사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아닐까?

한국전쟁이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과 베트남전쟁과 같은 통일 내전이라는, 주류와 다른 강 교수의 주장은 분명 주류의 의미작용에 차이를 만들어냈다. 차이는 그러나 정체성과 달리 안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차이는 기의가 아니다. 차이는 차이(들)의 놀이를 재현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기의에 고정되지 않는다. 의미작용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표일 뿐이다. 그저 미끄러지게 놔두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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