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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길이 더 지저분합니다
물가 길이 더 지저분합니다 ⓒ 김관숙
널려있는 과자 봉지들을 주워서 흔들어 봅니다. 과자가 들어있는 것은 털어내어 밟아서 잘게 부숴 놓습니다. 그러자 비둘기들이 꾸르륵거리며 내 발 앞까지 몰려 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남편은 벌써 멀리 가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 무뚝뚝하기가 그지없는 남편은 협조는커녕 나를 기다려 주지도 않습니다. 나는 남편이 그러거나 말거나 걸어가다가 과자봉지를 보면 털어내어 발로 적당히 부숴 놓고 갑니다.

맞은편에서 산뜻한 푸른 유니폼에 헬멧을 쓰고 무릎 보호대를 찬 아이들이 이 열 종대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며 오고 있습니다. 역시 비둘기들은 꿈적을 안 합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곡예를 하듯이 비둘기들을, 빈 병들과 빈 캔들을 아주 요리 조리 잘도 피해서 한 줄기 싱그러운 바람이 스쳐 가듯이 눈결에 지나갑니다.

ⓒ 김관숙
헬멧에 화려한 주황색 유니폼을 입고 자전거를 탄, 오륙십 대로 보이는 일 열 종대의 어른들 역시 쓰레기들과 비둘기들을 기가 막히게도 잘 피해서 갑니다. 그들 중에는 여자들도 있습니다. 부부 모임 같습니다. 그래선지 그들은 더욱 멋지고 근사해 보입니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봅니다. 너무나도 부럽습니다. 나도 자전거를 타기는 하지만 저렇게 건강 모임을 가져본 적은 없습니다.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도 모두 하나 같이 쓰레기들을 아주 잘 피해서 지나갑니다. 마치 당연한 풍경이라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저렇게 피해서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중년의 외국인 부부도 있습니다.

아빠와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오던 인형같이 예쁜 여자 아이가 과자부스러기들을 쪼아 먹는 비둘기 떼를 보자 "야아아-" 하고 환호를 하면서 멈추어 섰습니다. 헬멧 밑에 두 눈이 반짝 반짝 빛났습니다. 갑자기 사방이 환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널린 쓰레기들 때문에 어쩐지 비둘기 떼들도 추레해 보이던 차 였는데 여자 아이가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빠, 디카 가지고 나올 걸 그랬다 그치? ”
“다음에, 다음에. 넘 지저분해서 원…”
“나랑 비둘기들만 찍음 되잖아, 넘 예쁜데.”

그 아이 역시 당연한 풍경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충격 입니다. 그 새 안개가 걷히고 여린 햇살이 퍼지고 있습니다. 노랫말처럼 붉은 해가 떠올랐습니다. 간이 헬기장 앞을 지나는데 누군가가 "잠깐만요" 하고 나를 부릅니다. 빨간 야구 모자를 쓴 긴 머리의 젊은 여자가 잔디밭가에 주저앉아서 좀 일으켜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가가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저 눔의 개똥을 밟았지 뭐예요. 아이구 엉치야!”
“많이 아프세요?”
“좀요. 조기 의자까지만 좀---.”
“집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핸폰 해서 남편 부르면 돼요. 고맙습니다.”

내가 주머니에서 포켓용 화장지를 꺼내 통째로 주자 긴 머리 여자는 나를 의지하고 구부정하게 서서는 잔뜩 상을 찡그리며 스포츠 바지 여기 저기 묻은 개똥을 꼼꼼히 딲아 냅니다. 나중에 휴지통에 버릴 생각인지 쓰고 난 화장지는 발 밑 한 쪽에 모아 둡니다. 그리고 긴 의자로 가자 내 팔을 놓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핸드폰으로 남편을 부릅니다. 그런데 차분차분 상황을 설명하다가 말고 성깔이 탁 터집니다.

“야! 잔말 말구 빨랑 와! 차 갖구 오 분 안에!

그러더니 여자는 표정을 싹 바꾸어 나를 보고 예쁘게 웃습니다. ‘이 남잔 이러지 않음 안 되거든요’ 하는 눈빛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여자의 화장 끼 없는 얼굴이 여리고 해맑아 보입니다. 방금 터진 성깔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만 같은 것입니다.

꽃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납니다. 꽃밭들이며 조롱박 넝쿨이 무성하게 올라간 원두막이 보입니다. 꽃밭둘레를 따라 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거긴 별로 입니다. 꽃밭 구경도 하기 싫습니다. 봉숭아 채송화 환련화 분꽃 패랭이꽃 같은, 고향의 향기가 물씬 나는 꽃들은 하나도 없고 가꾸기 쉽고 꽃이 오래가는 외래종 같은 낯선 꽃들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 김관숙
바람이 없어 물결이 잔잔합니다. 술병과 캔이 한 무더기의 말 풀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둥둥 떠 있습니다. 제발 살려달라고 이 냄새나는 물에서 좀 건져달라고 둥둥 자꾸 말을 걸어옵니다. 물에서 그들을 꺼내 줄 힘이 없는 나는 얼른 머리를 돌려버립니다.

한강대교 밑에 하얀 모래사장이 있었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강물이 밀려나간 축축한 모래사장에는 무수한 작은 조개들이 굵은 실 같은 길 흔적을 남기면서 다니다가 모래 속으로 쏙쏙 숨어들고는 했고 몰려다니는 작은 물고기들이 저만큼 보이는 맑은 강물 위로는 흰 물새들이 깃털을 한껏 뽐내면서 날아 다녔습니다. 그때는 쓰레기 같은 것은 그 어디에서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목적지인 탄천까지 갔다가는 되돌아오다가 긴 의자에 앉아있는 남편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말없이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습니다. 거기 고수부지 역시 여기와 마찬가지로 지저분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위 풍경들은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햇살을 머금고 떠 있는 흰 구름도 아파트들도 빌딩들도 자신들의 거대한 자태만을 자랑하고 있을 뿐, 시침을 뚝 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부부처럼 그렇게.

남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뒤 따라 일어난 나는 발을 내디딛으려다가 말고 그대로 얼어붙었습니다. 하마터면 밟을 뻔 했습니다. 의자 밑에서 뻗어나온 가느다란 줄기 끝머리쯤에 한 송이의 진남색 나팔꽃이 말갛게 웃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환희 웃어 줍니다. 반갑고, 고마워서, 아, 그리고 또 무사히 넝쿨이 길게 길게 벋어나기를 속으로 빌면서 활짝 아주 활짝 웃어 줍니다.

나는 돌아서다가 끌리듯이 다시 진남색 나팔꽃을 보았습니다. 여전히 웃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청초합니다. 나는 진남색 나팔꽃 넝쿨을 가만히 들어서는 의자 밑으로 조금 밀어 넣어 줍니다. 그런 뒤 바로 거기 굴러있는 찌그러진 맥주 캔 하나를 집어 들고 훌쩍 돌아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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