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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없는 가을비가 무척 자주 내린다. 마음조차 추스르기 힘겹다.
쓸모 없는 가을비가 무척 자주 내린다. 마음조차 추스르기 힘겹다. ⓒ 김규환
비도 전령사란 말인가. 살이 시린 가을비가 쉼 없이 내렸다. 마음이 시린 건지 쓰린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거리와 풀잎, 나무, 기와집을 흠뻑 적시는 비가 오면 기온이 뚝뚝 떨어져 내 몸은 적응하느라 힘겹다.

엊그제는 건조해서 힘겨웠다. 오늘은 추워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코피를 쏟았다. 무슨 몸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은가. 계절이 바뀌면 온전히 넘어가는 법이 한번도 없다. 난 참 한심한 작자다.

기와집도 흠뻑 젖으니 사람이 축 쳐진다.
기와집도 흠뻑 젖으니 사람이 축 쳐진다. ⓒ 김규환
얼굴이 푸석푸석하는 정도가 아니라 살갗이 비듬같이 들고 일어났다. 이러다 얼굴에 지진이 일어나면 어쩌나. 아, 싸늘하고 을씨년스런 날에 벌써 커피 한잔, 따뜻한 국물이 그리워지는구나.

밖에 나가보니 백로가 외로이 서 있다. 왜 왔을까. 어디선가 날아왔으면 그곳이 집일 텐데 길을 잃었나. 아니다. 서울 보문시장 성북천 밑에 먹을 게 넘쳐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 또 심란하게 홀로 다니는 거야.

백로가 서울에서도 자주 보인다. 비만 그치면 이끼 투성이인데도 멋모르고 달려들었다 무슨 사고가 날지 걱정이다. 과연 청계천은 어떨까.
백로가 서울에서도 자주 보인다. 비만 그치면 이끼 투성이인데도 멋모르고 달려들었다 무슨 사고가 날지 걱정이다. 과연 청계천은 어떨까. ⓒ 김규환
비린내가 풍기고 멋모르는 물고기가 몰려들어 있으니 한 점 입맛을 다실 수 있으렷다. 한동안 걸음을 멈춰서 눈여겨봐도 한 자리에 있다. 이젠 사람과도 이토록 친해졌다니!

조화로운 세상도 좋지만 서울 인심 모르는 새가 안타깝다. 새로 뚫린 청계천 물길에도 온갖 물고기 드나들고 새가 찾아온다지만, 아이구나 철없는 그대들이 걱정이다. 사람과 친하지 말라.

군불 때던 시골집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다가왔다.
군불 때던 시골집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다가왔다. ⓒ 김규환
쓸데없이 고귀한 자태 보여주면 도시가 살았느니, 천변이 벌써 복원 됐느니 호들갑을 떨지니 제발 허상을 심어주지 마라. 반가운 새 한 마리를 봐도 정치적인 내가 왜 이리 궁색해 보이는가.

애라 모르겠다. 방구석에 들어앉은 이상 내 소신대로 살리라. 헌 집이면 어떤가. 마당엔 비가 쏙쏙 스며들어 빗물이 고일 턱이 없다. 장독대는 흠뻑 젖었지만 숨구멍을 한동안 막아놓았으니 장이 상할 리 없다.

비오는 날 낮에 연기가 나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고 싶다.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몸을 지지고 싶은 게다.
비오는 날 낮에 연기가 나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고 싶다.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몸을 지지고 싶은 게다. ⓒ 김규환
비 오는 날엔 군불을 때리라. 추적추적한 나무 한 데 모으면 처음에만 연기가 날뿐 이내 활활 타오를지니 축축한 옷이 마르고 눅눅한 몸이 보송보송해진다. 심란한 마음은 따스한 봄볕에 쬔 듯 덥혀질 것이다.

아궁이에 나무 가득 메워두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비를 두어 방울 머리에 이고 방으로 들어가 온기를 맞이하고 싶다. 아랫목은 실실 데워지고 있다. 이젠 무겁기만 하던 이불도 무게를 느끼지 못하니 하여간 절기는 속이지 못하는구나.

이불 둘러쓰고 아랫목을 향해 자꾸만 파고드는 내 발엔 김이 모락모락, 등줄기 서늘한 감정이 온기를 더하니 사르르 눈이 감긴다. 손바닥을 엉덩이 밑에 깔면 온 몸이 더워져 돌 판 위에 올려진 시체 같은 친구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자고 있는 동안 매캐한 연기 슬슬 엿보지만 송송 뚫린 벽 사이로 다시 빠져나가고 마는 즐거움을 아파트에서 맛볼 수 있는가 말이다. 고랫재와 흙, 마른 소나무 가지가 어우러져 향기 한번 그윽한지고.

가을에 뭔들 맛이 없을까?
가을에 뭔들 맛이 없을까? ⓒ 김규환
배 깔고 단잠을 자다 사람소리 들려 깨어보니 "차르르 찰찰" 집안에 기름 퍼지는 소리가 물방울 소리보다 더 간절하게 진동을 한다. 꿀잠에 벌꿀을 훔쳤던가. 부추 전에 막걸리 한 주전자 대령하였다. 몽롱한 꿈에서나 맛본 음식이 차려졌구나.

속이 더워지니 살맛나고 알딸딸한 기분이면 가을을 맘껏 즐기기에 충분한 것 아닌가. 아, 얼마나 좋은가. 한량(閑良) 흉내 내기 쉽지 않지만 무념 세계에 빠져드는 게으름 한번 피워보는 게 소원이다.

비가 오면 몸과 마음, 생활 용품까지 온통 재래식으로 바꾸자. 초가지붕에 구들장, 장독대, 마루, 아궁이, 정지, 마당, 측간이 그립다. 먹는 건 그 시절 즐겼던 부침개, 묵은지, 도토리묵, 된장국이면 좋겠다. 무엇보다 돌만 두개 나란히 놓인 뒷간에 앉아 즐거운 상상을 늘려가고 싶지 않은가.

널찍한 시골 변소 하나 전세내서 앉아 있노라면 궁상떨기 참 좋다.
널찍한 시골 변소 하나 전세내서 앉아 있노라면 궁상떨기 참 좋다.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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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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