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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햇살을 받는 숲과 벌판. 자연이 만드는 한 폭의 풍경화에 취해 사진을 찍고 있는 순례자.
첫 햇살을 받는 숲과 벌판. 자연이 만드는 한 폭의 풍경화에 취해 사진을 찍고 있는 순례자. ⓒ 김남희

숲은 사랑스럽고 어둡고 깊다
하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가 생각나는 길. 잠들기 전에 내가 가야 할 먼 길. 어두운 하늘 사이로 한 가닥 희미한 붉은 빛줄기, 아침이 오고 있다! 이렇게 간절히 아침을 기다려 본 적이 또 언제였을까.

한 시간쯤 걸었을까.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난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불에 타 검게 그을린 나뭇가지들. 가슴이 아파왔다. 식물은, 나무는 고통을 어떻게 견뎌낼까. 말없이, 비명을 토하지도 못한 채 견뎌내는 고통. 소리 내어 울 수 있고, 눈물을 피처럼 토할 수 있고, 비명을 지르거나, 스스로를 학대하며 고통을 견디는 우리들에 비해 식물의 견딤은 얼마나 장엄한가.

아, 정말이지 지구 위에 나무가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삭막했을까? 내게 있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존재는 나무이다. 진화의 가장 완벽한 형태처럼 느껴지는 나무들. 늙은 나무들(늙을수록 아름다워지는 건 나무뿐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싱싱한 것, 그것도 나무뿐인지도 모르겠다),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오래되어 늙고, 품 넓은 나무들. 그 나무들이 일제히 꽃이라도 피워내는 날이면, 내 마음의 가지에도 환하게 등불이 내 걸린다.

혼자 걷는 새벽 숲의 즐거움

불 탄 나무들 사이를 지나 마침내 고개의 정상에 섰다. 온 마을과 계곡이 한 눈에 들어온다. 뺨을 스치는 찬 공기. 밤나무 숲 사이 길을 지난다. 탁구공보다 작은 밤송이들이 열려 있다. 가지를 끌어와 만져보니 아직 부드럽기만 한 어린 가시들. 저 가시들이 단단해지고 속안의 밤알이 영글 무렵이면 나도 집에 가게 될까?

지팡이를 짚은 채 멈춰 서서 가야 할 길을 가늠해보는 순례자
지팡이를 짚은 채 멈춰 서서 가야 할 길을 가늠해보는 순례자 ⓒ 김남희
첫 햇살을 받은 밤나무 숲과 하늘. 빛과 그림자, 태양과 구름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아름다움. 이 아름다움 속에 완벽히 나 혼자이다. 레온을 지난 이후 눈에 띄게 늘어난 순례자들의 행렬이 부담스러웠는데, 오늘 혼자서 숲의 깨어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혼자 걷는 새벽 숲의 즐거움. 오늘 새벽길에서 내가 느낀 건 분명 환희, 삶의 환희였다. 아, 인생은 얼마나 아름답고도 짧은가. 얼마 전 누군가 보내준 영화 '트로이'의 대사가 생각난다.

"신들은 우리를 시기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많은 것들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지금 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울 때이다. 너는 다시는 이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우리는 다시는 지금처럼 여기, 이 장소에 이렇게 함께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이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밤나무 숲을 걸어 작은 산마을을 지나니 내려가는 길이다. 나오코와 만나기로 한 프라바델로 마을에 들어서니 그녀는 없다. 한 시간이나 늦었으니 아직 여기 있을 리가 없지. 여기서부터는 다시 순례자들의 물결이다. 가게에서 내 팔뚝만한 크기의 요구르트를 사서 한 병 다 마시고 출발. 날이 더워지고 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오늘은 가방 없이 걷는 사람들이 많다. 어제 머문 마을의 한 알베르게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가방을 택시로 배달해준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서비스를 이용했나보다. 가방 없이 걷고 싶다는 유혹이 들기도 하지만, 난 이미 무릎이 아플 때 한 번 이용했고, 내 짐은 내가 메고 끝까지 가야 할 것 같다. 힘들 때마다 남의 도움에 의지하는 습관을 키우게 되면 혼자 여행하는 나에게는 치명적일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다시 시작된 언덕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길은 가파르고, 땀은 비 오듯 쏟아진다. 오늘이 해발고도 600m에서 시작해 1500m까지 오른 후 다시 내려오는 날이라는 걸 깜빡했다. 지금껏 걸은 까미노 길 중에 오늘이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하루 같다. 풍경은 아름답지만 몸이 힘드니 감동도 희미해진다.

2시 반. 집요한 오르막이 마침내 끝나고 오 세브레이로에 들어선다. 탄성이 절로 난다. 아니, 무슨 마을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5분이면 되는 작은 마을이 전부 돌로 지어졌다. 마을 여기저기에 이엉을 올린 초가집(소시지, 햄을 훈제시키는 창고)이 어여쁘게 서 있다. 1년 내내 안개가 껴 전망을 보기가 힘든 곳이라는 데 오늘은 날이 좋아 산 아래 마을이 환하게 들어온다.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오니 호스피탈레로 아줌마가 기 치료를 해주신다.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시는데 나는 별다른 느낌이 전해지지 않아 그냥 얌전히 앉아 있었다. 동네 가게에 변변한 찬거리가 없어 과일과 과자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잠자리에 든다. 산티아고까지는 이제 152km!

2005년 7월 26일 화요일 흐리고 바람 불다
오늘 쓴 돈 : 아침 2.7 +과일 1 +숙박 3 +과자 1.93 +1.65 +저녁 8.7 = 16유로
오늘 걸은 길 :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 23km


지난 밤, 꿈을 꿨다. 내 마음을 가져간 이가 다정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너를 좋아해"라고 고백해 왔다. "나도 너를 좋아해"라고 말하고 달콤한 키스. 여기까진 완벽했는데, 그 후가 너무나 이상하다. 둘이 공원으로 피크닉을 갔는데, 한 여름 날씨에 그는 이 옷 저 옷 마구잡이로 껴입은 상태이고(아마도 그의 다중인격을 설명하는 코드인 듯), 어느 순간 그의 얼굴은 뚱뚱하고 못생긴, 전혀 다른 얼굴로 변해있다(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고 콩깍지가 떨어져 나간 이후를 설명하는 걸까?).

결정타는 한 한국인 할머니의 등장. 할머니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내게 내밀며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해왔다. 그에게 "동전을 얼마나 넣어야 해?" 하고 묻다가 돌아보니 할머니가 내 노트북과 카메라가 든 배낭을 들고 사라진 후다. 자신의 정체성, 자신이 가고자 하던 길을 포기하게 되는 함정에 대한 경고? 정말이지 사랑에 대한, 해석 가능한 은유가 가득한 꿈이지 않은가!

익숙한 얼굴을 만나면 잠시 멈춰 서서 그들을 기다려 함께 걷기도 한다.
익숙한 얼굴을 만나면 잠시 멈춰 서서 그들을 기다려 함께 걷기도 한다. ⓒ 김남희
어이없는 마음을 가다듬고, 짐을 꾸려 숙소를 나선다. 산 위의 작은 마을들 사이를 통과하는 오르막. 해발고도 1270m의 알토 데 산 로께(Alto de San Roque)에 오르니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가려고 고군분투하는 성 야곱의 조각이 서 있다. 8시. 알토 데 포이오의 바에서 아침을 먹으며 잠시 휴식. 가는 길에 야생 산딸기를 파는 집이 있어서 한 봉지 사 먹으며 또 쉬었다.

흐리고 바람이 부는 데다 길은 계속 초롱의 구릉지대와 숲을 통과해 걷기에 너무나 좋은 날. 초록이 눈을 즐겁게 한다. 하지만 발은 여전히 무겁다. 오늘 하루 사이에 물집이 5개나 새로 잡혔다. 잠시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고, 발가락들을 탐색해본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발들아, 내 발들아. 이제 제발 진정해다오. 너희들이 아무리 반란을 해도, 난 이 길을 가야만 한단다.

신부복을 입은 순례자가 내 앞을 스쳐간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지팡이를 짚고 걸망을 메고 이 길을 걷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마을의 작은 성당마다 들러서 미사도 참석하고, 유럽의 젊은이들과 불교에 대해 이야기도 하면서, 그렇게 걷는다면, 이 길이 얼마나 풍성해질까. 난 그 멋진 스님들을 모시고 가이드 할 준비도 되어있는데!

정오가 안 돼 트리아카스텔라 도착. 다음 알베르게까지는 14km를 더 가야하기에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이곳 알베르게는 인터넷도 없고, 부엌도 없고,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는다. 넘치도록 있는 거라고는 오직 파리들뿐. 동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얼굴 가득 덤벼드는 파리떼들.

초가로 이엉을 얹은 이 멋진 건물은 소시지나 햄을 말리는 훈제 창고이다.
초가로 이엉을 얹은 이 멋진 건물은 소시지나 햄을 말리는 훈제 창고이다. ⓒ 김남희

2005년 7월 27일 수요일 열 두 번 비 내렸다 그친 날
오늘 쓴 돈 : 엽서 2 + 코코아 0.9 + 빵 0.8 + 숙소 3 + 저녁 4.7 = 11.4유로
오늘 걸은 길 :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 - 페레이로스(Ferreiros) 32km


비가 내린다. 비 오면, 마음이 먼저 젖는다. 차갑고 습한 물방울들에 조금씩 몸이 젖어가고, 안경에 어린 물방울로 인해 눈앞이 흐릿해지고, 비릿한 물내음이 코끝에 감겨올 무렵이면, 내가 닦아놓은 마음의 길들은 이미 아득해지고 멀어진다. 비 오면 배낭을 내려놓고 싶어진다. 가던 길 멈추고 싶어진다. 정착하고 싶어진다.

배낭 덮고 잠바 꺼내 입고 걷는 길. 길에는 나오코와 나 둘 뿐.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새벽길은 어둡다. 핀틴(Pintin)에 도착해 아침을 먹었다. 오늘 길 위에는 계속 빗방울이 듣다가 멈추고 다시 듣기를 계속한다. 12시가 못 돼 바르바델로(Barbadelo) 도착. 이곳 알베르게가 1시에 문을 연다기에 더 가기로 결정하고 9km를 더 걸으니 페레이로스(Ferreiros). 침대가 22개뿐인 이곳 알베르게에 15, 16번째로 도착했다. 찬물에 몸을 씻고, 빨래하고 나니 3시. 다시 또 비가 내리고 있다. 이제 산티아고까지는 99km를 남겨놓았다.



2005년 7월 28일 목요일 흐린 후 개다
오늘 쓴 돈 : 아침 3 + 점심 7 + 숙박 8 + 음료 1 = 19유로
오늘 걸은 길 : 페레이로스(Ferriros) -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33.5km


5시가 되니 나오코가 깨운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짐을 꾸린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여자. 뭐든지 혼자 하고 싶어 하는 여자. 그런 여자 둘이 걷고 있다. 일주일째.

길을 나서니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한데 서편 하늘만 구름이 걷혀 별이 총총하다. 나오코가 랜턴을 켜 나는 좀 떨어져 걷는다. 이 정도 어둠에서는 내 눈을 믿고 그냥 가고 싶다. 자꾸 랜턴에 의지할수록 내 눈은 그 능력을 잃어갈 테니. 날은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오늘은 발이 너무나 무겁다. 왼쪽발의 물집들이 아우성을 질러댄다.

성야곱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스페인 순례자들. 해발고도 1270m의 알토 데 산 로께(Alto de San Roque).
성야곱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스페인 순례자들. 해발고도 1270m의 알토 데 산 로께(Alto de San Roque). ⓒ 김남희
발가락의 물집을 터트려가며 걷듯 삶의 물집들도 하나하나 터트리고, 땀에 전 옷을 빨아 말리듯 내 삶의 젖은 곳들도 드러내어 말리고, 밤마다 새로운 곳에 몸을 누이듯 내 마음도 어느 한 곳에 두지 말고 늘 어딘가로 가볍게 옮겨 다녔으면….

휴식 없이 4시간을 걸어 9시 20분에 곤잘(Gonzal) 도착. 바에서 오믈렛 샌드위치와 카모마일 차로 아침을 먹었다.

흐린 하늘 사이로 잠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옥수수밭이, 밀밭이, 소나무 숲길이 너무 어여뻐 열심히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야 알았다. 메모리칩 없이 찍었다는 걸. 아쉬워하는 나를 보며 나오코가 말한다. "괜찮아. 나중에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야."

한 번 가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한 번 가버린 것은 이미 사라진 것이다. 그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랑도, 청춘도, 맹세도, 가버리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지금 내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내 곁을 스치는 사람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 생생한 감정도 지나가면 그 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사라진 것들이 남기고 간 흔적과 상처, 그것들이 또 내 삶을 이끌어오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 온 거겠지. 그러니 나는 사라진 것들의 흔적으로 퇴적된 사람.

아주 드물게 가끔은 이렇게 말을 탄 순례자의 모습과 마주치기도 한다.
아주 드물게 가끔은 이렇게 말을 탄 순례자의 모습과 마주치기도 한다. ⓒ 김남희
오늘도 함께 걷고 있는 쥬느비에브와 로만을 만났다. 벌써 한 달째 함께 걷고 있는 두 사람. 두 사람과 헤어지기가 무섭게 나오코가 묻는다. "쥬느비에브와 로만 무슨 사이야? 쥬느비에브는 캐나다에 애인이 있잖아." 잠시 대답을 망설인다.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술에 취한 것과 사랑에 빠진 거라고 했던가. 쥬느비에브는 몰라도, 그녀를 향한 로만의 사랑은 이미 눈빛에 다 담겨있다.

"나도 모르겠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워. 살다보면 애인이나 남편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잖아. 어떤 사람들은 사랑 없이 부부라는 이름을 평생 유지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새롭게 찾아온 사랑을 믿고 오래된 약속을 깨기도 하잖아. 어느 쪽이 옳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의 사랑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전에 난 사랑 없이 부부라는 틀을 유지해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비겁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 뜨거움이 사라진 공간을 책임감과 약속, 의리와 믿음 같은 것들이 채워낸다면, 그게 더 용기 있는 삶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사랑의 또 다른 형태일 수도 있음을 믿는다. 쥬느비에브가 어떤 삶을 선택하든 그녀가 선택한 삶에는 책임이 따르고, 희열뿐 아니라 고통도 따르리라는 것. 그것만이 내가 경험으로 알고 있어,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오늘따라 길 위에 가족 단위의 순례자들이 많이 보인다. 어린 아이가 있는 가족들을 볼 때마다, 거리 위에 꽃잎처럼 날리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에게도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헛된 욕망이 솟는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를 가리키는 표지석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를 가리키는 표지석 ⓒ 김남희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잠든 아이를 안고 바다로 가고 싶다.
머루알 같은 눈을 또르르 굴리며 아이가 깨어날 때
그 눈 가득 푸른 바다가 걸어와 잠겼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이렇게 넓고 깊은 품이 있어 거기 기대어
길 없는 길의 끝까지 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아이와 함께 사박사박 걸어 강으로 가고 싶다.
강물에 손을 담그고, 여린 발목도 담그게 해서
우리는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것을,
사랑도, 삶도 흐르고 흘러가버리는 것이기에
매 순간을 마지막 날처럼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작은 새의 목젖처럼 부드러운 아이의 손목을 잡고 산으로 가고 싶다.
가슴을 팔딱거리며 높은 고개도 넘게 하고
구를 듯 넘어질 듯 고갯길도 내려오게 해
삶에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밤처럼 검은 빛깔의 코트를 입혀 밤의 거리로 나가고 싶다.
깊은 밤 푸른 적막의 한 가운데에 깨어있어,
밤이 깊어야 쏟아져 나오는 별을 바라보며
어떤 사랑은 보이지 않아도 평생을 함께 하는 것임을,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와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내 어깨 위에 목마를 태워 초원으로 가고 싶다.
푸른 초원 위에 아이와 함께 양 팔을 벌리고 누워
말없이 품안으로 안겨오는 하늘을 담고,
여린 풀들을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리라.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나무와 풀들을 바라보리라.
그리하여 삶이란 결국 흔들리면서도 끝까지 가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지금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사이, 물통의 꼭지를 잃어버렸다. 그게 없으면 물통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데…. 산티아고를 걷는 동안 난 너무나 많은 걸 잃어버리고 있다. 수건, 빗, 물집 따는 바늘에 이어 마침내 물통 꼭지까지. 마치 내 정신의 산만함을 말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몸이 지쳐가듯 마음도 지쳐간다. 오는 길 내내 산딸기를 따먹으면서 왔다. 나오코가 검게 익은 산딸기를 볼 때마다 내 손에 쥐어준다. "힘 내!"라고 말하면서.

울창한 숲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
울창한 숲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 ⓒ 김남희
1시 반.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도착. 마을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이미 가득 찼다. 사설 알베르게로 이동해 짐을 푼다. 빨래를 널고 있자니 마음이 흔들린다. 바람에 날리는 빨래를 보면 나도 빨랫줄에 거꾸로 매달려 저렇게 헹구어지고 싶다는 욕망이 든다. 아기옷부터 고무줄이 늘어난 어른의 속옷까지, 온 가족의 빨래가 함께 널려 있는 걸 보면 나도 저렇게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가족이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긴다. 밤이 내리고 있다. 내 고단한 어깨 위로.

2005년 7월 29일 금요일 비 오고 해 나고 다시 비 오고 또 해 나고...
오늘 쓴 돈 : 아침 3 + 차 0.8 + 점심용 빵, 음료 1.5 + 1.96 + 숙박 3 =10.3유로
오늘 걸은 길 : 팔라스 델 레이(Palas del Rei) - 리바디소 도 바이소(Ribadiso do Baixo) 26.5km


비에 젖은 숲에서는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가 난다. 살아서 싱싱한 것들의 풋내. 비릿하고 촉촉한 냄새. 젖은 숲에 들어서면 나무들은 아직 제 모습을 감춘 그림자로 서 있고, 그 나뭇가지 위 어디에선가 숲의 정령들이 어깨를 옹송거리고 모여앉아 젖은 날개의 물방울을 털어내고 있을 것만 같다. 날개를 치며 날아오르는 정령의 뒷모습이라도 눈에 밟힐까 싶어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젖은 숲에서는.

새벽 5시가 좀 넘어 길을 나서면 거리는 늘 어둡다. 이렇게 어두운 거리를 나선 건, 서울에 살 때 바위를 타러가던 주말뿐이었다. 그때 잠든 내 방을 흔들던 전화기 속의 짱짱한 선배 목소리. "아직 자고 있는 건 아니지? 얼른 나와." 늘 겁먹은 채로 머뭇거리고 주춤거리던, 스스로를 의심하며 도망갈 궁리만 하던 나를 격려하고, 질책하며, 믿어주며, 이끌던 선배. 내게 바위 타는 즐거움을 가르쳐준 형은 이제 없다.

그토록 사랑하던 산에 흰 가루로 묻힌 형이 못다 오른 산을 지금 다른 형들이 오르고 있다. '같은 곳에서 두 번 사고 안 난다'는 말만을 의지한 채 초조히 남편을 기다리고 있을 연미언니를 생각해본다. 나는 그렇게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어디선가 그렇게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내 발걸음은 무거울까, 가벼울까. 지금 키르키즈스탄의 큰 바위벽을 오르고 있을 선배들을 위해 잠시 기도를 올리고 다시 걷는다. 아직도 숲은 어둡고 깊다.

다시 비가 내린다. 멜리데(Melide)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오코와 합류해 뜨거운 차를 마시며 잠시 몸을 말린다. 메세타에서는 태양이 내 의지마저 활활 불태워 재로 만들더니 갈리시아에서는 비가 이렇게 또 마음을 적신다.

붉은 옷과 초록 숲의 어울림
붉은 옷과 초록 숲의 어울림 ⓒ 김남희
오는 길에 검게 잘 익은 산딸기를 땄다. 한 봉지 가득! 쪼그리고 앉아 길가에 자라는 야생 민트잎도 땄다. 알베르게에 와서 민트차를 끓이고 산딸기를 접시에 담아 사람들과 나누었다. 탄성을 지르며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기쁘다.

여기 리바디소 도 바이소(Ribadiso do Baixo) 마을의 알베르게는 정말 예쁘다. 강가 바로 옆에 자리한 돌집에는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이 딸렸다. 잔디에 드러누워 물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니 여기가 천국 같다. 이 알베르게를 '최고의 알베르게' 목록에 올려놓는다.

하루에도 열두 번 해가 나왔다 들어갔다 비가 내렸다 멈췄다, 정원으로 달려가 빨래를 널었다 걷었다, 날씨가 마치 하루에 열두 번 바뀌는 변덕스러운 내 마음 같다.

여기서 만난 독일인 부부 소니아와 우벤. 열 네 살 딴 딸과 함께 산티아고를 걷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 케테 콜비츠의 원화를 소장하고 있다는 그들. "난 걷기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이 길에 섰어"라는 남편에 비해 부인 소니아는 이렇게 간단하게 말한다.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야." 이 길의 끝에서 복잡한 마음이 정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선정한 '최고의 알베르게' 리스트에 올라간 리바디소 도 바이소 마을의 알베르게
내가 선정한 '최고의 알베르게' 리스트에 올라간 리바디소 도 바이소 마을의 알베르게 ⓒ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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