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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풀빛/2005
책표지/풀빛/2005 ⓒ 이국헌
윤리학은 딱딱하다는 인상을 종종 주게 된다. 대학의 강단에서 수년 째 윤리를 가르치고 있지만 교양으로서의 윤리를 그렇게 좋아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현대 젊은이들은 윤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인지, 아니면 윤리학이라는 이론적인 분야를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부정하는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가끔씩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윤리니 철학이니 하는 주제와 관련해서 대화를 하려고 하면 대부분의 경우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반응을 듣게 되어 진지한 대화를 이어가지 못한다. 정말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윤리나 철학은 고루하고 진부한 고전적 학문에 불과한 것일까?

윤리학을 철학의 한 분야로 정착시킨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붙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윤리학의 본질이 무엇임을 밝힌다. 그에 따르면 윤리학이란 “행복한 삶에 대한 탐구”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라는 그의 유명한 철학적 정의와 더불어 그 행복을 얻기 위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강의 형식으로 풀어 놓은 저 유명한 윤리학의 고전을 통해 오늘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오랜 동안 청소년과 대학생들에게 윤리를 강의해 온 홍석영 선생님에 의해서 청소년용으로 편찬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우리 아이들과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대화를 가능하게 해 주고 있다. 그의 노력에 의해 쉽게 번역된 이 책을 자녀들에게 읽힌 후, 행복한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눠보자.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최고선과 행복

아들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건 행복이야 말로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선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 행복이란 무엇인지 아니? 어떤 사람은 쾌락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단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자족, 즉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행복이라고 말하기도 하지.

그러나 이런 것들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기엔 이성을 가진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하기엔 좀 부족하지 않을까? 가장 좋은 것은 어쩌면 무엇이든 목적에 맞게 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선은 인간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이지. 여기서 인간의 기능이란 정신적 활동을 통해서 덕을 잘 수행하는 기능, 즉 덕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거야. 그래서 인간의 행복이란 덕이 있는 삶을 사는 거라고 말할 수 있지.

덕이란 무엇인가?

아들아, 행복이 완전한 덕을 실현하는 행동이라면 덕은 과연 무엇일까? 인간의 덕은 “정신적인 덕,” 즉 “도덕적인 덕”을 말한단다. 이 도덕적인 덕은 습관을 통해서 얻는 것이란다. 집을 지어봐야 건축가가 될 수 있고, 거문고를 타봐야 악사가 될 수 있듯이 옭은 행위를 하는 바른 습관을 가져야 도덕적인 덕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인 덕은 습관을 통해서 형성된 성품을 말한다고 볼 수 있어. 덕은 인간을 선하게 하고 인간의 삶을 잘 가꾸도록 도와주는 성품인 거야. 알겠니?

이 도덕적인 덕이 진정한 덕이 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강조했단다. 중용이란 지나침도 아니고 모자람도 아닌 중간 상태, 즉 “마땅한 때, 마땅한 일에, 마땅한 사람들에게,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중간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볼까? 용기는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용기가 지나치면 무모함이 되고, 용기가 부족하면 비겁함이 되기 때문이지. 따라서 용기라는 중간 상태만이 두려움과 태연함과 관련해 진정한 덕이 된단다. 이런 식으로 절제는 중용이고 지나치면 방종, 방탕이 되고, 부족하면 무감각이 된다. 긍지는 중용이고 명예욕이 지나치면 오만함이 되고, 그것이 부족하면 비굴함이 되는 거야. 친절이라는 중용이 지나치면 비굴, 아첨이 되고, 부족하면 심술궂음이 되는 식이지. 결국 진정한 덕은 용기나 절제, 관후, 긍지, 온화함, 친절 등과 같이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중간 상태인 중용인 거지.

이 중용을 잘 지키는 것이 도덕적인 덕을 수행하는 것이고, 결국 그런 삶이 행복한 삶이 된단다. 이 중용을 지키는 삶을 매우 힘들고 어렵단다. 그래서 중용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거야. 아마 사람들이 윤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이런 노력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윤리란 단어인 '에티카'는 습관을 뜻하는 에토스에서 파생한 거야. 노력을 통해 습관을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지.

다시 행복에 대하여

아들아, 행복이야 말고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 윤리란 이러한 “행복한 삶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나도 나의 아들에게 윤리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거란다. 다시 행복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거지.

행복이란 어떤 상태가 아니고 하나의 활동이란다. 만일 행복이 어떤 상태라고 한다면, 그것은 식물인간처럼 일생 동안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도 속해야만 하지. 그러나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단다. 행복한 생활은 덕이 있는 활동이란다. 그건 다시 말해 우리 속에 있는 최고의 덕을 따르는 삶을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가장 고귀한 덕을 따르는 이성의 활동이 완전한 행복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단다.
“자기의 이성에 따라 활동하고 그 이성을 가꾸고 자라게 하는 사람은 최선의 정신 상태에 있으며, 또한 신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 이 사람은 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일에 마음을 쓰고, 또 옳고 귀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그가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행복한 삶에 대한 탐구

아들아, 요즘 사람들은 윤리니 덕이니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건 그 사실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적 쾌락과 삶의 편리를 추구하는 경향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란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에 대한 추구야 말로 매우 중요한 모색이 아닐까?

행복은 본성적으로 주어지는 축복이 아니고, 또 정태적으로 느껴지는 상태도 아니야. 그건 이성의 활동을 통해서 습관에 의해 경험되어지는 최고선의 구현이야. 그렇게 우리의 이성적 활동을 통해서 덕에 이르는 경험을 하게 될 때 행복은 우리와 함께 하는 경험이 된단다. 이 행복한 경험이 너의 삶에도 풍성하기를 바란다. 아마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그걸 바랐겠지.

윤리는 딱딱한 고전 이론이 아니다. 더욱이 상황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편리 수단도 아니다. 그건 행복에 관한 탐구요, 그 탐구를 통해 얻어지는 습관으로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윤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가르침이요,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지침이다.

그 윤리학의 기본이 된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의 아이들에게 행복의 길을 들려주자.

덧붙이는 글 | 아리스토텔레스 / 니코마코스 윤리학 / 홍석영 풀어씀 / 풀빛 / 2005


니코마코스 윤리학 - 그리스어 원전 번역, 개정판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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