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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우리 부부의 결혼15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선물을 주고받는 대신에 저녁 외식을 하기로 했지요. 시간이 되어 예약해 놓은 몽골식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빅토리아 할머니 댁에 들렀습니다. 일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빅토리아 할머니를 우리의 저녁 외식 나들이에 모시고 가기 위해서였지요.

함께 살고 있는 큰딸내외가 지금 호주로 휴가여행을 떠나서 혼자서 저녁을 차려 먹어야 하는 빅토리아 할머니를 사려 깊은 아내가 초대한 것이랍니다. 물론 일주일 전쯤에 미리 말씀을 드려놓았지요.

그때 할머니께서는 뜻밖의 저녁 외식 초대에 "9월 22일이 무슨 날이냐"고 우리에게 물으시더군요. 솔직한 아내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나이는 드셨어도 아직 명민하신 할머니는 "너희들 결혼기념일이구나, 그렇지?"라고 바로 맞추셨습니다. 혹시 부담을 드릴까봐 숨기려고 했지만, 거짓말을 못하는 아내는 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그렇게 뜻깊은 날에 자기를 초대해줘서 너무나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빅토리아 할머니는 어제 우리 결혼15주년 기념 저녁 식사의 귀중한 손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예약된 테이블에 앉자 할머니께서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놓았습니다. 카드와 선물꾸러미. 이럴까봐 아무 말씀 드리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아내와 나는 고맙기도 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걸 어쩌지 못합니다. 이런 우리 마음을 눈치채셨는지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선물을 사왔노라고, 자, 어서 풀어보라고.

먼저 카드를 꺼내 축하의 글을 읽고서 나는 정성스럽게 포장한 선물 꾸러미를 풀었습니다. 둥근 원통형에 담긴 내용물이 과연 뭘까? 궁금해하는 우리의 마음보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할머니의 마음이 더 두근거리는 듯합니다.

▲ 빅토리아 할머니가 우리의 결혼15주년 기념선물로 주신 수정달팽이
ⓒ 정철용
드디어 포장을 다 풀고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수정(crystal)으로 만든 달팽이! 두개의 뿔을 삐쭉 내민 귀여운 수정 달팽이가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지켜보던 아내가 탄성을 지르고 딸아이 동윤이는 너무 귀엽다면서 박수를 칩니다. 나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달팽이의 출현이 너무나 뜻밖이어서 그만 큰 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습니다. 가벼운 소란에 옆 테이블에서도 우리 쪽을 쳐다볼 정도였습니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그런 우리를 쳐다보십니다.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금방 알아차립니다. 지난 7월 빅토리아 할머니와 큰딸 내외인 안젤라와 앨런을 우리 집에 초대하여 함께 저녁 식사를 했을 때, 그들에게 비디오 테이프를 하나 보여준 적이 있었지요.

지난해 5월 <오마이뉴스>에 올린 내 글을 KBS의 < TV동화 행복한 세상> 제작팀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달팽이를 위한 불침번'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하고, 그걸 복사해서 보내준 테이프였습니다. 실제로 우리 집에서 있었던 달팽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그들은 얼마나 재미있어 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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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밤마다 불침번을 서는 이유

이후로 할머니께서는 우리를 만날 때마다 가끔씩 우리 집 정원의 달팽이와 상추의 안부를 묻기도 하셨지요. 그리고 내가 그렇게 밤마다 잡아서 놓아준 그 달팽이들 중의 하나를 이렇게 우리 부부의 결혼15주년 기념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집 상추 잎을 갉아먹을 염려가 전혀 없는 아주 귀엽고 깜찍한 장난감 달팽이를. 더군다나 결혼15주년은 수정혼이라고(이 사실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가 할머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답니다) 해서 특별히 수정(crystal)으로 만든 달팽이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너무나도 곱고 깊은 할머니의 마음씀에 나는 눈시울이 뜨끈해졌습니다. 할머니께서 우리의 눈시울을 적셔준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랍니다. 일가 친척 하나 없는 외국에 나와 사는 우리를 마치 자신의 친손주처럼 생각하시고 그동안에도 많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지요.

▲ 지난 4월에 선물받은 털실로 짠 침대용 담요
ⓒ 정철용
지난 5월 날씨가 조금씩 쌀쌀해지기 시작하자 할머니께서는 거의 한 달 동안 틈틈이 손수 뜨개질을 해서 짠 침대용 담요를 우리에게 선물하셨습니다. 이불 위에 그냥 덮고 자는데 얼마나 따스하던지. 털실로 짠 것이어서 그런 탓도 있지만 할머니의 따스한 마음이 담긴 것이기에 더 그랬을 테지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성이 안 차셨는지, 그러고 나서 한 달쯤 후에는 딸아이 동윤이의 침대에 깔 담요도 하나 짜서 선물해 주셨습니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핑크 색으로 짠 그 담요를 선물로 받고 동윤이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이외에도 지난 해 크리스마스에는 손수 반죽해서 구운 맛있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성탄 선물로 주셔서 연말에 우리 집에 초대한 영화 감독 지아(Zia)와 함께 맛있게 먹기도 했지요.

▲ 빅토리아 할머니께서는 딸아이의 침대용 담요도 짜서 선물로 주셨다
ⓒ 정철용
그런 기억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며 다시 한 번 할머니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할머니께서는 아내와 나의 손을 꼭 잡으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라고 당부를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습니다. 이렇게 남들에게 베풀기 좋아하시는 할머니이시지만, 정작 당신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던 탓일까요?

할머니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답니다. 젊었을 때 영국 런던에 사셨던 할머니께서는 첫 남편과 이혼하고 공군이었던 두 번째 남편을 따라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쯤에 이 낯선 땅 뉴질랜드로 오시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잘 생긴 두 번째 남편을 따라 다니는 여자들이 많아서 결국 그도 할머니를 떠나게 되었고 이후 첫 남편 사이에 난 큰딸과 둘째 남편 사이에 난 작은딸을 혼자서 키우셨다고 합니다.

피붙이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여자 혼자 힘으로 두 딸을 키워내야 했으니 그 고생이 오죽 했을까요? 그런데도 할머니께서는 말씀 끝에 그 두 번째 남편 덕에 이 살기 좋은 땅 뉴질랜드까지 오게 되었고 그래서 이렇게 우리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를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십니다.

▲ 할머니가 주신 수정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그리고 오래오래 사랑하면 살아가리라
ⓒ 정철용
그래요.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할머니의 이런 고운 마음입니다. 어제 할머니께서 주신 저 수정 달팽이에는 할머니의 그런 고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올해 여든 넷이 된 빅토리아 할머니께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저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그리고 오래오래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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