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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특이하고 별스럽다고 할 수 있지만 머리가 복잡하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남들은 담배를 한 대 피우거나 음악을 듣거나 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저는 고등학교용 수학문제집을 꺼내서 풉니다.

▲ 며칠 전 속초도서관에서 책 빌려 나오다가 입구에 쌓인 수능 모의고사 시험지를 주워 왔다. 이것 때문에 또 며칠은 스트레스를 잘 풀 것 같다.
ⓒ 송주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거의 이십여 년. 기억조차 가물가물 해서 그때 뭘 공부했는지 떠오르지도 않지만 유독 문제집을 꺼내서 짧은 문제라도 하나 풀고 나면 머리가 그렇게 맑아질 수가 없습니다. 문제라야 수열이나 미적분도 아니고 그저 간단한 더하기, 빼기 정도지만.

알맞은 두께에 오래 전부터 익숙하던 종이 냄새 그리고 한 때는 진짜로 매달렸던 그 기억이 뼛속에 남아 있어서였는지 산만하던 정신을 불과 일 이 분만에 아이스크림처럼 차고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정화효과란….

<수학의 정석>에서 효과를 보자 그 다음엔 국어, 영어, 국사… 집중력이 떨어져서 전 과목은 못 풀고 기껏해야 한 번 집중에 고작 몇 문제 풀면 '땡'입니다. 하지만 시험 때문에 푸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에 여유가 있다 보니 오히려 더 잘 풀립니다.

"그야말로 대학입시가 인간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산 증인이지."

이 나이에 대학에 새로 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시험을 볼 것도 아니면서 하고 많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두고 하필이면 수능시험문제를 푸느냐고 아내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전 올해도 수능시험 바로 다음 날 신문에 나올 2006학년도 대입 수능문제가 벌써 기다려집니다. 정작 시험 당사자였을 땐 주체하기 힘든 중압감을 어찌하지 못 했는데 이젠 남의 일처럼 대해도 되는 형편이다 보니 그렇게 편안하게 다가올 수가 없는 겁니다.

세상 사는 일도 이렇게 대하면 울고 불고 할 일이 없을텐데….

매일 일정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밥을 주면 그 다음엔 밥 없이 호루라기 소리만 들어도 입에서 침이 고인다는 파블로프의 실험처럼 전 그렇게 훈련받던 사춘기의 그늘을 평생 가지고 가야 할 모양입니다.

요즘 수험생들이 들으면 정말 별난 사람이겠지요? 저는 이해보다는 암기로, 수학도 모르면 문제를 외우라고 배웠습니다. 외우는데 둔한 성격만큼 장점도 없는 법, 외우라면 외웠습니다. 그게 세상사는 이치겠거니, 그래야 밥이라도 벌어먹겠거니 하고 말입니다.

그렇듯 전 국민교육헌장에서 열심히 외우던 "새역사를 창조하자"의 창의력과는 다르게 살아왔습니다. 그렇다 해서 설마 나더러 창의적이지 않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말입니다.

그러나 '근의 공식을 써보시오' 에서 '근의 공식을 증명해보시오'로 문제가 바뀌는 세상에서 그 과정까지는 외울 머리가 안 되는 사람에게 지식은 폭력과 다름 없었습니다. 난 그저 외웠을 뿐인데. 그걸 증명하라니.

영문도 모르고 외웠던 것들을 이제 많은 시간을 두고 살피니 그 이치가 이렇게 재미있고 오묘한 것임을 뒤늦게 알아가면서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왠지 화가 납니다. 옛날에 나에게 가르쳤던 그 사람들도 선생이고 지금 나 역시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팔자이면서도 과정보다 결과를 추구하는 거대한 틀에 매여 있었다는 억울함 때문입니다.

더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으면 가르쳐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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