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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하루 전날 사립문 앞을 밤늦도록 서성인 건 밀린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명절 하루 전날 사립문 앞을 밤늦도록 서성인 건 밀린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 김규환
달이 초승달에서 상현달로 차오르더니 열사흘부터 열나흘이 되자 거의 배가 불러 동산을 치고 올라왔다. 쟁반만큼 풍요하게 하늘 한가운데 둥둥 떠서 동네 구석구석을 비춘다. 방안은 밤이 깊을수록 더 어둡다.

어머니는 으스름한 호롱불 빛에 의지하여 벽장을 뒤지더니 조그만 수첩에 깨알같이 적힌 숫자를 확인하고 몸빼바지 안에 미리 세어둔 돈을 챙겨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엄마, 이 늦은 밤에 어디 가실라 그요?”
“아짐 집에 좀 댕겨 올란다.”
“왜라우?”
“니기 엄니 바쁘다. 거시기 뭐시냐, 춰온 돈 갚아야제. 오날 아니믄 욕 얻어먹는당께. 핑 댕겨올 텡께 집에 있그라와~.”

들은 체도 않고 뒤따라 나섰다.

“낼 갚으믄 안돼요? 깜깜헌디 뭣 할라고 이 늦은 밤에 나가시오? 다들 자겄구먼.”
“글도 안 되야. 이자가 문제가 아니라 어치케든 드려야 명절을 쇤당께.”
“몇 집 가야되는디라우?”
“낮에 다 디렸응께 한 집만 가믄 되야.”

치맛자락을 잡고 엄마 냄새를 맡으며 질질 끌려가듯 나선 기분이 괜찮았다. 언제나 아쉽게 빌리러만 다니던 어머니가 오늘은 당당하게 빚을 갚으러 가고 있지 않나. 내가 빌린 듯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는데 명절을 앞두고라도 갚아버린다니 덩달아 기쁘다.

누구든 빌릴 땐 아쉬운 소리 한없이 한다. 당장 갚을 것 같이 이야기하지만 맘 같지 않은 게 세상살이다. 돈이라는 게 빌려 줄 땐 서서 주고, 받을 땐 엎드려서 받는다는 말이 있다. 어머니는 그 관행을 깨트리신 분이다.

사전 약속도 하지 않은 어머니는 문밖에서 서성였다. 마침 나락을 베러 나가신 이웃은 늦게 돌아와 차례를 준비하고 일찍 주무신 모양이다. 전화도 초인종도 없던 때라 대문 앞에서 사람이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부르며 기다려야 한다.

동네가 떠나가도록 크게 부를 수도 없다. 이웃집에 미안하기도 하고 개라도 깨웠다가는 온 동네가 시끌벅적할 게 분명하다. 하는 수 없이 나지막하게 들릴락 말락 불러야 한다.

“지시오? 어이 성님, 째까만 나와 보랑께.”
“…….”
“안 들린 갑네. 어짜쓰까잉~”
“지가 들어갔다 오끄라우?”
“아녀 저짝으로 가봐야 쓸랑갑다. 정제 뒤쪽에 가서 불러봐야 쓰겄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추석 땐 달빛이 설엔 별빛이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추석 땐 달빛이 설엔 별빛이 지켜보고 있다. ⓒ 김규환
대문 앞을 떠나 그 집 뒤쪽으로 가기 위해 달빛마저 비치지 않는 어두컴컴한 고샅길로 접어들었다. 대목장을 보러 갈 때 주기로 했지만 마련하지 못하고 형들이 부친 소액환(小額換)을 우체국에 가서 현금으로 바꿔와 밀린 돈을 갚는 중이다.

신용 하나는 알아주기에 동네사람들은 어머니가 빌려달라면 돈과 쌀, 보리쌀을 가리지 않고 빌려줬다. 갚을 때가 되었는데 사람을 만나지 못해도 당신 스스로 안달이었다. 갚지 않고는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니 이 오밤중을 마다하지 않고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성님, 성님! 순이 어매~”

나도 안 되겠다 싶어 입에 두 손을 모으고 작은 소리로 불러봤다.

“병문아~”

귀뚜라미소리만 이어질 뿐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해만 떨어지면 밥 먹고 자는 습관도 그렇지만 내일 새벽같이 들로 나가는 그 집안 내력은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게다가 벌써 자리에 누운 건 큰딸 순이 누나가 집안 살림을 도맡듯 하니 정지에서 설거지에, 차례를 준비하는 달가닥 소리를 낼 일이 없이 한갓진 것도 있다. 새근새근 자는지 주변 말이 들리지 않은가 보다.

“글먼 낼 일찍 오지라우.”

잠시 머뭇거렸다. 어머니는 여러 궁리를 하신 듯 아무 말씀 없이 또 길을 나선다. 그때 쥐새끼 한 마리가 길바닥을 달리다가 담장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우리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어머니가 모든 걸 작파하고 들어가실 줄 알았다. 어린 내 짐작은 틀리고 말았다.

“니째야.”
“예?”
“너 시방 엄니 말 잘 들어라.”
“왜라우?”
“딴 것이 아니고, 엄니가 사립문을 한 삐짝 열어 줄 텡께 들어가서 한 사람 깨워갖고 오니라. 알았쟈?”
“잉, 알았어라우.”

나무에 대를 쪼개 만든 양쪽 문에 소용돌이처럼 생긴 굵은 철사를 오그려 단단히 걸어 잠갔다. 온 힘을 다해 한쪽 문을 들어 옮기니 조금씩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에게 담장이나 문을 넘으라고 하시면 될 것을 어머니는 체통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계셨다.

“됐다. 되았어."
"들갔다 올께.“

마당에 들어서니 정말 코를 콜콜 골며 한 집안 식구들이 각자 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머니 깊은 뜻을 전하러 간 나였기에 그냥 나올 수는 없었다. 궁리를 했다.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안 나는 도리 없이 문고리를 뒤흔드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달가닥 달가닥”
“아~짐!” “아짐!”

몇 번을 흔들어도 마찬가지다. 큰일이었다. 안에서 사립문을 여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라 여기고 다시 마당을 걸어 나왔다.

“왜?”
“아녀라우, 아무도 안 인나요.”
“후딱 문 열어보니라.”
“알았어라우.”

달과 벼가 어울려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는 올 한가위는 풍요하면 좋겠다.
달과 벼가 어울려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는 올 한가위는 풍요하면 좋겠다. ⓒ 김규환
문을 원상태로 하고 철사를 빙글빙글 돌리자 꽉 닫혔던 빗장이 풀렸다. 어른과 아이는 차이가 있을까? 헛기침을 한번 하고 힘주어 “성님!”이라고 하자 “누구요?”라고 한다. 맥이 풀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저랑께라우.”
“웬일이여, 시방?”
“나와보싯쇼.”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마루에 호롱불이 켜졌다.

“냘 오면된디 뭔 일이여?”
“글도 그것이 아닌께라우. 아숨찮아서 잠이 오간디…. 여그 춰온 것인디 맞을 것이요. 공책에 따놓은 대로 8천원이오.”
“됐어 됐당께. 어여 가.”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와 나는 체증이 가신 듯 홀가분했다.

어머니는 1년 중 며칠을 빼곤 궁하게 사셨다. 아버지 주막에 가시는 용돈은 외상으로 다녔으니 문제될 게 없었다. 술이라는 게 어디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건가. 윷놀이 한판이면 몇 달치 밀린 걸 하루에 청산할 수도 있고 보리타작이나 추곡수매가 끝나면 주막집부터 찾으니 뭔 걱정이던가.

집안 살림은 달랐다. 어머니의 신용이 곧 교육이었고 위신이었으니 자식 키우는 사람으로서 당신이 내게 보여준 값진 자산이다. 벼룩의 간마저 빼먹고 백주대낮에 코를 베어간다는 세상이라고 한다. 체불임금 없는 명절이 되길 바란다. 자신이 다 쓰고 난 다음에 고자세로 갚는 건 꼴불견을 넘어서 인간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꼭 갚아야 될 돈이 있거든 일부라도 변제하면 이 어려운 시기에 갖가지 나쁜 감정도 봄눈 녹듯 사르르 풀리지 않을까 싶다. 즐거운 명절에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첫째 서글픔이요, 풍성하지 않는 살림이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고향마을 저수지 맑은 물에 맘을 씻고 오려면 빚이 없어야 한다.
고향마을 저수지 맑은 물에 맘을 씻고 오려면 빚이 없어야 한다.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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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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