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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책 표지 ⓒ 동방미디어
시인 정양 안도현, 평론가 이대규 등 전북문학지도간행위원회가 쓰고 펴낸 책 <땅은 바다를 안고>는 한 마디로 전북의 서해안 지역에 대한 문학지도라고 할 수 있는 책입니다.

전북 정읍이 고향인 제게는 그 분들이 답사했던 지역이 젊은 시절 한때 제 삶의 숨결이 녹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마음 속 깊숙이 숨겨 놓았던 추억을 꺼내 함께 책을 읽는 맛은 더욱 각별했습니다.

책은 크게 군산, 김제, 부안, 고창 등 네 지역으로 나누어 독자들을 문학의 현장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 네 지역 출신의 시인이나 작가를 찾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의 무대 등 작가가 아닌 작품의 배경 무대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굽이쳐서 탁하다 - 군산

맨 처음 찾아가는 기행지 군산은 백제 최후의 전쟁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길을 내준 이래 역사적 격변기마다 외세에 크게 몸살을 앓았던 곳이지요.

또한 군산은 1899년 개항 이래 일제시대를 지나면서부터는 나주, 김제. 만경 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공출해 가기 위한 곳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아직까지도 미 공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국 근대사의 상처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시인이나 작가는 상처 속에서 탄생하는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군산 지역이 지닌 상처 속에서 <탁류>의 채만식, 고은 시인, 시집 <단층>의 시인 이병훈 등 어느 지역보다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태어났습니다.

책은 먼저 채만식 소설 <탁류>의 무대를 찾아갑니다. 임피면 소재지 근처의 채만식 생가에서 시작해서 식민지 시대 조선은행 건물 맞은 편에 있었던 미두장(미곡취인소)을 지나 '온통 색주가집 모를 부은 개복동 아랫비탈'로 갑니다. 이곳은 2002년 화재로 매춘여성 14명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지요. 그곳에선 채만식이 <탁류>를 썼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성 착취의 역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현실을 확인합니다.

자본의 찌꺼기들이 흘러드는 째보선창을 거쳐서 채만식 문학비가 있는 월명공원 하구둑 채만식 문학관에서 소설 <탁류>의 무대를 찾아가는 기행은 막을 내립니다.

격정의 시인 고은을 빼놓고는 군산 출신 문인들을 얘기할 순 없을 겁니다. 고은 문학을 찾아가는 기행은 고은 시의 요람이랄 수 있는 미제방죽을 먼저 찾아갑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그의 시 가운데 <만인보>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 근처에 많이 살았었지요.

고은 시인은 머슴 대길이와 종종 할미산에 나무하러 갑니다. 대길이는 쉬는 짬이면 먼 데 바다를 바라보곤 합니다. 그 대길이 아저씨 때문에 시인의 마음 속에선 '바다'의 정서와 이미지가 일깨워지고 마침내 바다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었지요.

고은 시 <머슴 대길이> 일부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은 고은 시인이 처음 출가했던 동국사, 용둔리 고향집을 들러 그가 다녔던 미룡초등학교에서 끝납니다.

'항구에서 서성이는 사내들'이라는 글 속에는 안도현, 송수권, 박용래, 강형철 등 군산항과 그 폐허를 노래했던 많은 시인들이 나오고 '갈대와 서걱이고 철새와 날고 싶은'이라는 글 속에서는 금강의 풍광을 유난히 좋아했던 최형 시인이 나옵니다.

어두운 시대를 살다간 깨끗한 영혼의 시인 이광웅과 "시인의 광주리는 비어 있는 하늘이다"라고 말하는 이병훈 시인 등도 군산이 가진 크나큰 문학적 자산이지요.

땅이 곧 하늘이다 - 김제

김제 만경은 일제에게 수탈당했던 조선 농촌의 상징 공간입니다. 구래서 우리는 그 너른 들을 아픔없이 바라보지 못합니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안도현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 일부


많은 시인의 소재가 돼 주었던 만경들을 일별한 후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의 무대인 김제 청도리 귀신사를 찾아가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를 돌아봅니다.

대하소설 <아리랑>의 발원지인 김제 죽산면 내촌마을을 들른 다음엔 윤흥길의 소설 <기억 속의 들꽃>의 무대인 만경강 다리, 소설 <완장>의 무대인 백산 저수지로 발길을 옮깁니다.

서정인의 난해하고도 아름다운 소설 <금산사 가는 길>의 산실이었던 금산사는 많은 시인들이 노래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김시습의 시 <금산사에서 자며>를 비롯, 장만영 시인의 시 금산사 가는 길>, 유강희 시인의 시 <금산사> 등 많은 시인들의 소재가 되었던 복받은 곳입니다.

푸르러 애달프다 - 부안

부안은 고려 시대의 시인 김구와 조선의 선비 반계 유형원이 살았던 고장이며 문인 유희경과 교우를 쌓았던 기생 매창의 고장이기도 하며 신석정 시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부안 문학기행의 첫 여정은 4백년 전 이땅에 살았던 기생 매창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 됩니다. 부안이 낳은 숱한 문사들의 흔적을 제쳐놓고 맨 처음 매창을 찾아가는 이유를 책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과 사랑으로 인해 신열을 앓았다는 것. 그 때문일 것이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아픈 곳에 먼저 손이 간다'. 어디 매창만 아팠겠는가. 나도 너도 한 번은 아팠거나, 아프거나, 아플 것이다.

매창이 유희경과 사귀며 주고 받았던 시 가운데 가장 절창인 <이화우>는 4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감동적인 정서적 울림을 안겨 줍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더라


이 아름다운 기녀 매창에 바치는 시인들의 헌사는 오늘날에도 그칠 줄 모릅니다.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는 <매화뜸>을 써 매창의 고운 글발을 그렸으며, <이매창의 무덤 앞에서>라는 시 속에서 송수권 시인은 "하룻밤 그녀의 집에 들러 불끄고 갈만하다'고도 노래 합니다.

'모항에서의 하룻밤'이란 글에서는 모항에서 태어나 한 번도 모항을 떠나지 않고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시인 박형진 시인과 그의 시 세계를 보여줍니다.

부안 문학기행의 마지막 장면은 목가적 시인 신석정이 살았던 집 부안 읍내 청구원과 변산면 대항리 해창 석정공원을 찾아가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변산 바닷가에 서서 석정공원 신석정 시비에 새겨진 그의 시 <파도>를 읽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뜨거울는지요.


갈대에 숨어드는/소슬한 바람/9월도 깊었다./철 그른/ 뻐꾸기 목멘 소리/애가 잦아 타는 노을//안쓰럽도록/어진 것과/어질지 않은 것을 남겨놓고//이대로/차마 이대로/눈 감을 수도 없거늘/山을 닮아/ 입을 다물어도/자꾸만 가슴이 뜨거워 오는 날을//소나무 성근 숲 너머 파도소리가/유달리 달려드는 속을//부르르 떨리는 손은/주먹으로 달래 놓고/파도밖에 트여 올 한 줄기 빛을 본다.

신석정 시 <파도> 전문


마음부터 붉어진다 - 고창

요즘에는 고창하면 복분자 술부터 떠올리게 되지만, 예전에 제가 학교 다닐 적엔 서정주 시인의 시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선운사 골짜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서정주 시 <선운사 동구> 전문


선운사 본당을 향하기 전 도솔암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가면 진흥굴이 나오고 내원궁을 지나쳐 조금 더 가면 송기숙의 대하소설 <녹두장군>의 1부 1장 <비결> 의 배경을 이루는 마애불이 나옵니다.

1892년 동학 접주들이 선운사 도솔암 미륵불에서 비결을 꺼내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는 소설 <녹두장군>은 한 바탕 세상이 뒤집힐 것을 염원했던 그 시대 민중의 소망을 적절히 형상화한 송기숙의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지요.

선운사는 선운사 자체보다 동백꽃이 더 유명한 어찌 보면 주객이 전도된 곳입니다. 서정주 시인 말고도 김용택 시인, 최영미 시인 등도 이 선운사 동백꽃을 노래했지요.

이 책의 말미는 조선 후기 판소리 연구가 동리 신재효를 찾아가는 길로 마무리 됩니다. '소리판, 그 질긴 삶의 목청'이라는 글은 전라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의 소리인 판소리가 가진 위대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서 판소리의 위대함은 창자의 매끄럽고 윤기나는 소리가 아니라 '그늘' 속에서 빚어진 것이며' 피를 토하듯이 오랜 시간을 기울여 자신의 한을 삭히는 과정을 통하여 승화된 것이다.

문학기행은 공간을 더듬어 시간 속으로 떠나는 여행

전북문학지도 간행위원들은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닥도닥 쓸어내려야 했던 푸른 한숨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겨주길 바란다. 그렇게 우두커니, 해찰하듯 먼 곳으로 눈을 돌리는 독서를 권하고 싶다. '문학지도'가 답사한 공간은 유한한 것이지만, 거기 담긴 시간은 사실상 무한한 것......공간을 더듬어 시간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 이 같은 책자를 읽는 묘미 아니던가.

서문의 말마따나 지난 5월에 책을 사놓고 해찰하듯이 읽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마치 아이가 맛있는 과자를 아껴 먹듯이 말입니다. 책 사이사이에 간간히 섞여 있는 사진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고, 우선 정양, 안도현 시인 등의 감칠 맛나는 문체를 음미해가며 읽는 재미도 솔찬했습니다.

찬 바람나는 가을에 막상 떠나려 해도 떠날 곳이 마땅찮을 때 달랑 이 책 한 권만 손에 들고 떠나는 문학기행을 상상하면 마음이 먼저 알고 즐거워집니다.

덧붙이는 글 | <땅은 바다를 안고> 

지은이: 전북문학지도간행위원회
출판사: 동방미디어
책값: 9천원


땅은 바다를 안고 - 전국문학지도 1

전북문학지도간행위원회 엮음, 동방미디어(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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