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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걸은 길을 다시 보니 참 예뻤다.
무심코 걸은 길을 다시 보니 참 예뻤다. ⓒ 양중모
처음에는 다소 짜증이 섞여있었지만, 점차 중랑천을 여자친구와 함께 걷다보니 새로운 기분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그저 운동하려고 자전거를 탈 때 무심코 휙휙 지나다니던 길인데, 그녀와 함께 걸으니 마치 여행을 온 듯 했다. 길가에 있는 꽃들도 예뻐 보였고, 중랑천도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게 절로 마음을 편안히 해주었다.

얼굴에 미소를 띠울 무렵,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내 주위를 감쌌다. 옆을 돌아보니, 꽃을 들고 여자친구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 속일까 싶어 경계의 눈빛을 열심히 보냈건만, 역시나 그런 눈빛을 무시하고 그녀는 그녀 손에 들린 꽃을 내 귀에다 꽂으려 했다.

하란다고 해버렸다.
하란다고 해버렸다. ⓒ 양중모
아니 내가 무슨 <웰컴 투 동막골>의 강혜정처럼 '꽃 꽂았습니네다'라는 말을 들을 것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꽃을 꽂고 얼굴 팔리게 중랑천 길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난 격렬한 저항을 거듭했지만, 결국 여자가 먹으란다고 멸치를 먹어 실컷 비웃었던 구재희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전거를 타고 한가로운 오후 햇살을 즐기는 할아버지나, 운동 나온 아주머니들의 시선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지만, 얼마 후 난 내가 꽃을 꽂은 사실 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바보야! 이거 ○○꽃이잖아!"

오로지 시멘트 바닥만 보고 자라 꽃이나 나무, 풀등에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던 나와 달리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여자친구는 꽃이나 나무, 풀 등에 대해 비교적 잘 알았다. 그리고 그 자라온 환경의 차이 때문에 무던히도 등을 난타당해야 했다.

그녀 말처럼 서울 샌님이라 그런 건 잘 모른다고 박박 우겨보아도, 나중에 애들 낳아서 '코스모스 보고 진달래꽃이라고 할 것'이라는 그녀의 심각한 우려에 난 눈물을 머금고 학습에 임해야 했다.

"이건, △△꽃이고, 이건 □□꽃이야."

그녀는 열심히도 설명했건만, 애당초 그런데 관심없는 난, 귀로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어려서 그녀가 설명해주는 것들을 볼 수 있었던 시골에 내려가도 내 관심사는 오로지 밤나무 등에 집중해 밤을 떨어뜨려 먹는 일에 있었으니, 그녀의 설명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말아올리니 신기하게도 꽃이 완성되었다.
말아올리니 신기하게도 꽃이 완성되었다. ⓒ 양중모
그러다 그녀가 보여주는 마술 같은 손놀림에 빠져 그녀의 설명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눈을 반짝반짝 하게 되었다. 뭐, 물론 그 꽃이 무엇인지 어디서 자라는지 등은 내 관심사 밖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장난감 총으로 친구들 맞추어가며 삭막하게 놀던 내게 자연을 이용해 놀았던 그녀의 예전 모습을 보여주는 건 분명 신기한 일이었다.

긁으니 신기하게도 노란색이 나왔다.
긁으니 신기하게도 노란색이 나왔다. ⓒ 양중모
나뭇잎 가지를 따서 쭉 따 올리더니 꽃 모양을 만들어 묶고, 노란 색 꽃 하나를 꺾더니 그 끝으로 천연 물감이라며 내 팔뚝에 노란색을 그려주는 등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뭐, 사실 산에 있는 꽃을 보고도 아주 기초적인 것들을 제외하고는 통 이름 하나 모른다는 게 부끄러운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도시에서 자랐으니 난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란 꽃을 발견한 그녀!
노란 꽃을 발견한 그녀! ⓒ 양중모
그러나 그녀가 자연을 이용해 놀았던 모습을 보면서 난 내 곁에 있는 보물과도 같았던 중랑천이라는 선물에 대해 얼마나 무심했던가를 새삼 깨달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될 수도 있어 가치있는 것이, 그 가치를 모르는 이에게는 보잘 것 없는 게 되어 버리는 건, 유독 오래된 골동품이나 고문서 등에 제한된 것만은 아닌가 보다.

그 날 디지털 카메라를 안 가지고 나가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쉬워, 더워서 가기 싫다는 여자친구를 끌고 다시 중랑천에 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리고 그 날 보지 못했던 해바라기를 보자, 그녀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졸랐다.

해바라기는 태양만을 바라보다 해바라기가 되었다는데, 그녀도 내가 그녀만을 바라봐주기를 원해서 같이 사진 찍어주기를 원한 것일까. 서로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남자가 여자의 말대로 따르는 건, 때로는 한심한 짓일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정말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남자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싶어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랬기에, 회색 숲에서 자라 회색만이 다인 줄 아는 내게 푸른 숲에서 자라 푸른색을 사랑할 줄 아는 여자친구가 곁에 있는 건, 좀 맞아가며 배우는 게 아쉽긴 하지만,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바보 같기에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에 그녀 말을 들어주는 거, 그 당연한 진리를 난 또 한 박자 늦게 깨달았나 보다.

덧붙이는 글 | 앞으로도 자연 공부 좀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아 그리고, 물론 전 코스모스랑 진달래는 당연히 구분할 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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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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