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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 속의 몸부림과 현실에서의 몸부림.
자궁 속의 몸부림과 현실에서의 몸부림. ⓒ 임기창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3년이 저물어가는 12월 초였다. 나는 야학에 갓 발을 들이민 풋내기 교사였고, 그는 야학과 몇 년씩이나 연을 맺고 있던 '선배'였다. 그런 그가 퍼포먼스를 한다며 자원봉사자를 구하는 공지를 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뭔가를 한다'는 데 의욕을 느끼며 자원했다.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강성국. 그는 장애우였다. 적어도 우리 '정상인'들이 규정짓기로는 그랬다. 짧은 몇 마디를 하려 해도 몸 전체를 뒤틀며 온 힘을 짜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안쓰럽게 보기에 앞서, 나는 여느 장애우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그의 당당함에 매료됐다.

사람이 갖고 있는 고착화된 관념을 파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 파괴는 대개의 경우 상당한 고통을 수반한다. 그런데 그것이 별 저항감 없이 파괴될 때, 파괴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꽤 기분좋은 쾌감을 느낄 수 있음을 그를 통해 알게 됐다.

그는 '장애'에 대한 나의 개념을 바꿔놨다. 1급 뇌성마비 환자와 아무 스스럼없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농담따먹기를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전에는 결코 하지 못했으니까. 그는 수동적인 '보살핌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를 아는 많은 이들에게 강성국은 단지 '약간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 인간의 언어란, 의식체계란, 얼마나 피상적이고 간사한지.

당시 내가 보았던 그의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일거에 타올라 소진되어버리는 듯한 그 에너지, 제한된 육체의 움직임 속에 응축된 그의 의지는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카타르시스를 나로 하여금 느끼게 했다. 그 후로 그의 퍼포먼스는 볼 기회가 없었지만, 홍대, 대학로는 물론 경기도, 강원도까지 누비며 몸을 사르던 그의 열정은 이따금 내게 기분좋은 자극이 되곤 했다.

며칠 전 그의 퍼포먼스 소식을 들었다.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리는 '마일 연극의 날' 행사에 출연한단다. 그래서, 이번엔 그를 찾았다. 세상을 향한 그의 몸부림이 그간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하는 기대와 더불어, 그를 꼭 '기록'해야겠다는 다소의 의무감과 함께.

어둠 속을 걸으며, 그는 꽃을 하나 둘 꽂는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려는 마음으로 꽃을 꽂는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려는 마음으로 꽃을 꽂는다. ⓒ 임기창
공연시작 약 40분 전쯤 그를 만났다. 밝은 표정이었지만 공연의 부담감이란 그도 어쩔 수 없는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긴장을 풀어주고자 탈의실 옆에서 약간의 농담을 주고받았고, 그간의 동향과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이번 공연에 대해 물었다.(박스기사 참조)

김백기 작가와 호흡을 맞춘 이번 <달 속의 그림자> 공연은, 장애우의 깊은 그림자 속에서 빛을 찾아가는 무언의 과정, 그리고 비장애인과의 괴리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두 팀 정도의 공연이 끝나고, 드디어 그의 차례가 왔다. 비쩍 마른 몸을 이끌고, 손에는 꽃 한 다발을 쥔 채 그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어둠 속을 걸으며, 그는 꽃을 하나 둘 꽂는다. 그로 인해 세상은 조금이나마 아름다워진다.

그의 뒤를 눈을 가리고 머리에 촛불이 켜진 등을 인 김백기 작가가 따른다. 장애우가 아름답게 만들어 놓은 세상을 비장애인인 그가 무참히 짓밟는다. 의도된 짓밟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자신의 눈이 편견으로 가리워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 뿐이리라. 인식할 수 있다면 그건 더이상 편견이 아니므로.

꽃을 다 꽂은 장애우는 이제 그림을 그린다. 붓으로, 자신의 발자국으로, 자신의 몸 전체로. 그가 그리는 것은 해바라기다. 햇빛을 반사하는 달, 그 달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그는 해를 바란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비장애인은 자궁 속으로 회귀한다. 그리고는 몸부림친다. 마치 전생에서 쌓은 편견의 업을 풀고자 하는 듯.

해바라기를 다 그린 장애우는 일어나 마이크 앞에 선다. 그리고는 노래를 부른다. 김광석의 '사랑했지만'. 그제서야 그가 장애우임을 안 몇몇 관객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머, 진짜 장애인인가봐."

그는 왜 하필 이 노래를 부른 걸까. '그대를 사랑했지만 /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해바라기는 태양을 바라볼 뿐, 태양 가까이 갈 수는 없음을 인정해버리고 마는 것인가.

그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자궁 속에서 버둥거리던 비장애인은 결국 다시 한번 세상으로 나온다. 그러나, 전생에서 그의 눈을 가렸던 편견의 장막은 더 흉칙해진 모습으로 변해 그를 옥죄고 있다. 육체를 초월한 생의 순환조차도, 달 속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는 없었다. 결국 둘은 각자의 한계를 짊어진 채, 다시금 서로의 길을 간다.

공연 후, 나는 다소 불쾌했다

자신의 희망을 담아 해바라기를 그린다.
자신의 희망을 담아 해바라기를 그린다. ⓒ 임기창
30분 남짓한 공연이 끝난 후, 나는 밀려오는 '찝찝한' 기분에 다소 불쾌해했다. 한계는 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이 공연은 그에 대한 답은 제시하지 않았다. 장애우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고, 비장애인이 지니고 있던 편견도 결국 파괴되지 않았다. 그럼, 그 다음엔?

김백기 작가는 그것이 "비장애인에게 주어진 삶의 업보"라고 말했다. 결국 그러한 편견을 깨뜨리기 힘든 것이 현실이며, 작가의 의도는 바로 그 현실을 보여주려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김 작가는 "퍼포먼스는 보는 이에게 무한한 해석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알아서 느끼고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무대에서 소비한 에너지는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그 에너지가 폭발해, 결국 한계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다고 생각한 나는 아직도 기분이 영 찝찝하다. 나 자신도 그 업보를 계속 짊어질 것을 생각하니 한층 더 찝찝하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사지 멀쩡해 보이는 한 남자가 앉아있는 승객에게 다가가 대뜸 "장애인인데 자리 좀 비켜주세요"라고 말하는 걸 보았다. 이 사람이야말로 스스로의 한계를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럼에도 힘겹게 해바라기를 그리던 강성국의 모습이 그와 겹쳐졌다.

"장애를 부각하고 싶지는 않다"
본격적인 퍼포먼스 활동에 돌입한 강성국 퍼포머

▲ 공연 시작 전의 강성국. 그는 자신을 더이상 "장애인 퍼포머"로 보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임기창
강성국은 지난 21일까지 서울올림픽미술관에서 열린 '베를린에서 DMZ(비무장지대)까지' 행사에 퍼포머로 참가한 바 있다. 이것을 나는 이제 '장애인 퍼포머'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리려는 시도로 받아들였고, 내 생각이 맞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본격적으로 퍼포머 활동을 하려고 하는데, 거기 묶여있으면 발전이 없지 않겠냐"며 "더이상 '동정이나 사려고' 퍼포먼스를 하지는 않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자신을 여느 행위예술가들과 동일한 시각으로 봐 달라는 얘기다.

그러니 그가 이번 공연에 꽤나 불만스러웠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의 불만은 "왜 꼭 '장애'라는 부분을 부각해야만 하느냐"는 점이었다. 작가와 이미 합의를 본 사항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가시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공연 후 가진 뒤풀이에서도 그는 내게 그런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도 장애우들의 참여의식을 제고하려는 노력을 여전히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공연예술치료회'라는 모임의 일원인 그는 공연예술치료를 통해 장애우들이 스스로의 벽을 깨고 당당하게 사회의 구성원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우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장애우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아 어려움이 있다고 밝혔다.

그의 다음 행보는 일본. 10월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 관련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싶다고 한다. 일본 쪽과 어떻게 접촉했냐고 묻자 "그런게 왜 필요하냐, 퍼포먼스는 그냥 길가에서 내키는 대로 하는 거야"라며 면박을 주었다. 다만 현지인들의 반응이 다소 걱정되기 때문에 김백기 작가와 동행은 하되, 퍼포먼스에 관한 사항은 전적으로 자신이 계획하고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한국 유일의 장애인 퍼포머'라며 자랑하는 강성국. 그가 그리는 해바라기가 태양에 가까이 가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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