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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서(處暑) 날 아침이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가을이 시작된다는 날.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뉴질랜드는 봄빛이 점점 짙어지고 있으니 처서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런데도 나는 달력의 오늘 날짜 아래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처서'라는 글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왠지 선뜻하게 느껴지고 구름이 약간 낀 하늘도 오늘 아침엔 한 뼘쯤 높아진 느낌이다. 아직도 북반구식 계절 감각이 더 익숙한 내게는 8월은 한여름이고 8월의 끝자락은 자동적으로 가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이 오랜 계절 감각을 남반구식 달력에 맞추는 데에는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인가.

하루의 시간으로는 한국보다 겨우 세 시간을 앞설 뿐이지만 계절은 항상 두 계절을 앞서가는 뉴질랜드에서 내 몸과 마음은 자주 두 계절을 동시에 살아가곤 한다. 오늘 처서 날 아침, 뉴질랜드의 따스한 봄 햇살 아래서 내가 올려다보는 하늘은 한국의 맑고 드높은 가을 하늘이다.

내려다보는 우리 집 안뜰에서도 나는 봄과 가을을 동시에 본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후두둑 통째로 떨어져버린 동백꽃들과 새로 심어 푸릇푸릇한 어린 상추들로 가득한 봄이지만, 내 마음 속 눈에는 상추꽃과 들깨꽃이 피어나고 고추와 호박이 익어가던 가을 풍경이 겹쳐 보인다. 지금 가을을 맞이하는 한국의 어느 집 안뜰의 풍경이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지난 4월에 써두었던 글과 찍어두었던 사진을 아래에 옮겨본다.

2.

우리 집 안뜰에 상추꽃이 노랗고 앙증맞게 피었다. 그동안 그렇게도 많이 상추를 심어서 먹었는데도 상추꽃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상추는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잎이 억세어져서 채소로서의 생명이 끝나기 때문에, 꽃대가 올라오는 즉시 뽑아버리고 다시 상추모종을 사다 심고는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놔두기로 했다. 꽃을 피우기 위해 막 꽃대를 올리기 시작하는 상추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이 너무나 무자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점으로는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상추란 이젠 더 이상 쓸모 없는 채소에 불과하지만, 저들도 식물인 이상 꽃을 피우고 씨앗을 품어야 옳지 않겠는가.

ⓒ 정철용
그런 생각으로 며칠 내버려두었더니 쑥쑥 올라온 상추 꽃대는 방사형으로 가지를 내었고 그 가지의 끝마다 물에 불은 쌀알 크기만한 연두색 꽃봉오리가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앙다문 그 입이 열리고 작고 앙증맞은 노란 상추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직은 따갑게 느껴지는 한낮의 햇빛이 그 예각을 좀 누그러뜨린 어느 날, 저 노란 상추꽃이 진 자리에 가을이 알알이 맺히리라.

그렇게 씨앗으로 맺힐 가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들깨도 마찬가지다. 샐비어꽃처럼 돋아난 꽃대의 수많은 방안에 종(鐘)처럼 들어앉은 하얀 들깨꽃이 피었다. 상추꽃과는 달리 특유의 고소하고도 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들깨꽃 향기는 종소리처럼 퍼져나가 멀리 서 있는 내 코에까지 와닿는다.

ⓒ 정철용
그 향기에 이끌려 들깨 앞에 쪼그려 앉는다. 하얀 꽃들이 벌써 밥튀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있다. 하얀 종을 잃어버려 종대(鐘臺)는 비었지만 오히려 빈자리의 향기가 더 진하다. 그 빈 종대에 곧 하얀 종소리보다 더 향기롭고 그윽한 까만 침묵들이 빼곡하게 들어차리라. 가을이 좀 더 깊어지면.

3.

한여름이 지나고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씨앗을 품기 위하여 꽃을 피워내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벌써부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서 씨앗을 그 안에 품는 채소들도 있다. 호박과 고추가 바로 그들이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고추는 아직도 싱싱한 초록을 자랑하고 있다. 잎도 푸르고 뻗어나간 고춧대가 휘청할 정도로 매달린 고추들도 푸른 색 일색이다. 아직도 부지런히 꽃을 피워내고 꽃 진 자리에 갓난아기의 손가락만한 아기 고추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 고추에게는 가을은 아직 먼 모양이다.

ⓒ 정철용
덕택에 이번 여름에 고추는 원 없이 먹었다. 아내는 겨울용 반찬으로 먹기 위하여 간장과 식초를 넣은 병에 고추를 넣어 만드는 고추장아찌를 네 병이나 담가 놓았다.

호박 농사는 이와 달리 흉작이다. 맨 처음에 수정된 호박을 빼고는 결실이 없다. 암꽃들은 수정이 되었어도 좀처럼 크게 자라나지를 못하고 어떤 암꽃들은 피어나지도 못한 채 시들고 말았다. 땅이 거름지지 못한 때문이리라. 아는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어 호박죽 잔치를 벌이려고 했던 처음의 부푼 꿈은 아무래도 접어야 할 것 같다.

ⓒ 정철용
꿈을 접고 며칠 전에 처음 결실을 맺은 호박을 수확했다. 저울에 달아보니 3kg. 이 둥그런 호박 속에 한여름 햇빛이 가득 차 있을 터이다. 요즘 그 열기를 식히려고 식탁에서 말리고 있는 중이다. 가을이 제법 깊어졌을 무렵, 노랗게 익은 그 한여름을 꺼내 되직한 호박죽을 끓여 가족들과 이웃들과 함께 나눠 먹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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