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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은 싸움 도중에 부서져서, 다시 초본을 만들어보았다.
원본은 싸움 도중에 부서져서, 다시 초본을 만들어보았다. ⓒ 양중모
전 네 정거장 차이일 뿐이라고 우겼으나, 여자친구는 열 정거장 차이라고 했고, 그것이 결국 큰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참을만 했습니다. 그런데 여자친구가 전철을 타고 가다 갑작스레 "선물은?"이라고 물어보면서부터, 일이 다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내려서 보여줄게."

900일 되기 전날 밤, 여자친구가 "선물을 달라"고 선제 공격을 가하자, 전 "돈이 없어 좋은 선물을 사주지 못한다"며 강력한 방어전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돈 안들여도 되는 선물을 가져오라"라는 여자친구의 이 한마디에 KO패 하고 말았습니다.

학교 다닐 때야 남자 답지 못하게 '러브장'등 이것 저것 만들어 줘보기도 했지만, 이제는 어쩐지 보다 물질적인 것을 선물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무언가 만들어가는 그런 선물을 하기는 어쩐지 꺼림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아직 취업을 하지 않은 상태라, 비싼 선물을 사주기는 어렵고, 그리고 선물은 '돈보다 마음'이라는 생각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무언가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예전처럼 러브장을 만든 것은 아니고, 동전을 이용한 선물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돈보다 마음이라더니, 결국 돈을 이용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제 나름대로 멋진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연도별로 동전을 모아 하트 모양을 만들고, 중앙에는 그녀가 태어난 해의 동전을 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말해주기로 했습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은 다르지만, 앞으로 걸어갈 길은 항상 같이 했으면 좋겠어. 사랑해"

동전 뒤에 양면 테이프를 붙여 다 진열해 놓고 나니,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뒤에 한지를 깔고, 크린랲으로 도화지를 감쌌습니다. 스스로 흡족해 하며, 좋아할 여자친구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부족함이 많은 이 선물을 많은 사람 앞에서 보이기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랬기에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세 여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 앞에서 선물을 꺼내 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저보다 힘센 그녀가 가방에서 제 선물을 빼냅니다.

한참 관찰하더니, "이게 뭐야. 랩으로 싸놓은거야?" 라고 말합니다. 아 정말 무지 창피했습니다. 뒤에 있는 여학생 둘이 힐끔힐끔 보며 웃음을 참습니다. 덩치 큰 놈이 이걸 만든 것도 창피하지만, 잘 만들지도 못해 더 창피했고, 여자친구가 무안을 주는 바람에 더 부끄러웠습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여자친구가 미워 전 결국 골이 나고 말았습니다. 전철에서 내려 제가 만든 걸 들고 서있으라는 말에 너무나 모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또 다시 2차 대전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다, 어쨌든 대학로 길을 같이 걸었습니다. 그러다 그녀가 길거리 좌판 DVD판을 보려 앉아 있다, 제게 말합니다.

"용서해 줄게. 서러웠어?"

어려서부터 막내로 자라 온갖 어리광을 다 부리고 자란 나는 그 말을 듣고 울먹거리는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얼마전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갑자기 겹쳐 보이기도 하고, 마음을 몰라준 게 야속하기도 하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게다가 "나 사실 그 선물 좋았는데"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참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화해를 하고,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느덧 저도 마음보다 물질이 있어야 제대로 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제가 만들어 놓은 선물을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들지 못했던 것일까요.

'900일 기념일'을 참 밋밋하고, 재미없게 보냈지만, 집에 돌아와 그녀 전화를 받는 순간 100일 이후로 거의 기억에 남는 일이 없었던 100일 단위 기념일 중 900일은 기억에 남을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선물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오빠 내 기사..정식 기사로 채택되었는데, 어디에 배치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900일을 하루 앞둔 날 여자친구는 제게 메신저로 들어오라고 하더니, 이런 저런 사진을 보내주었습니다. 마트 소액 계산대에서 소액이 아닌 상품을 계산하는 사람들 관련 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보고 그와 관련 기사를 써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 이번에는 제가 쓰는 대신 그녀에게 <오마이뉴스>기자회원으로 가입해 글을 써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영화에 관해서만큼은 좋은 글을 쓸 수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고, 900일을 기념해 시민기자 커플이 되어 보는 것도 기억에 남을 듯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평상시에는 귀찮다던 그녀가 저와 마음이 통했는지, 그 제의를 받아들여 글을 쓰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글을 편집부에 보내기 전에 꼭 제게 먼저 보여달라"는 부탁에 따라, 글을 다 쓴 후 제게 보내주었습니다.

여자친구의 첫 기사가 사는이야기 면 sT로 채택됐다.
여자친구의 첫 기사가 사는이야기 면 sT로 채택됐다. ⓒ 양중모
나름대로 열심히 쓴 흔적이 보였지만, 전 초고를 보고 '생나무 기사'가 될 확률이 80~90% 이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오마이뉴스 1호일지도 모를 시민기자 커플의 꿈이 사라져 가려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결심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시민기자들이 처음 글을 올릴 때 겪는 어려움을 알기에, 어떤 형식으로 써야 기사 채택이 잘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손보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중간에 귀찮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으나, 기억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900일을 위해, 그리고 또 하나의 것을 같이 공유하기 위해 열심히 고치고 고쳤습니다.

그녀의 의도와는 좀 다른 부분도 있어, 제가 고친 글을 그녀가 다시 고쳐 마침내 편집부에 송고했습니다. 그리고, 900일에 만나서 그녀와 내내 싸우던 제게 그녀가 쓴 글이 사는 이야기 면 탑기사로 채택된 것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건 분명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저 그녀에게 900일에 꼭 기억에 남을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역시나, 때로는 물질이 대신할 수 없는 마음의 자리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녀와 공유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었다는 기쁨도 컸지만, 그 기쁨도 잠시, 전 그녀가 보내온 문자 하나로 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시사회 진행 문화, 내가 써볼꺼야."

제가 늘 생각해오던 기사를 자신이 쓰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늘 바늘과 실처럼 붙어다니니, 앞으로는 기삿거리가 겹치는 경우도 있을텐데, 그 때문에 또 싸우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그렇긴 해도 그녀가 기자 회원으로 가입한 이상, 또 하나의 꿈을 키워봅니다. 1000일 되는 날에는 둘 모두의 기사가 메인면에 걸리게 되어 기억에 남는 날이 되기를.

덧붙이는 글 | 앞으로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는 시민기자 커플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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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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