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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36년은 치욕의 식민지 세월이었다. 많은 애국지시와 독립운동가 선대들이 목숨 걸고 감옥가고 투쟁했으나 일본에 항복을 받은 것은 연합군이었다. 우리 민족의 힘으로 광복을 쟁취하지 못한 한은 곧장 분단으로 이어졌다. 분단된 한반도는 좌우익 갈등과 6.25전쟁을 낳고 이로 인해 수많은 민족이 목숨을 잃고 아직도 분단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60년 전, 해방의 그 해는 내가 5살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나는 몇 가지 해방 전후의 특이한 일들에 기억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우리 집 바로 뒷집이 참봉 할아버지네 당숙의 집이었는데 일본 분주소가 있었다. 일본 순사들이 긴 칼을 차고 왔다 갔다 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참 멋이 있었다고 느끼기도 했다.

집에서 1킬로 쯤 가면 초등학교가 있고 그리고 면사무소가 있었다. 그 사이에 신사참배단이 있어 가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참배행사를 하는 것을 구경했다. 또한 우리 마을에 유달리도 무궁화 꽃이 많았는데 우리들 보고 그 무궁화 꽃나무를 쳐다보면 눈병이 걸린다고 해서 우리는 그 꽃나무 앞을 지날 때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고 지나쳤다.

형이나 누나들이 책을 읽고 일본말을 하는 것을 자연히 듣게 되었지만 히꼬끼 히꼬끼 센세이 등 몇 마디만 기억에 남는다. 이렇듯 나의 광복은 철부지였기에 일본물이 들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식민지하의 아픔을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전쟁의 끝자락에 공출을 걷는다고 쇠붙이며 철로 된 물건들을 모아 가곤하였다.

이런 기억에 해방의 그날에는 참봉 할아버지 댁에는 라디오가 있어 일본이 항복을 했다는 방송을 듣고 작은 마을이 요란스러웠다. 이때 우리집안에는 아버지와 어른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내로 가는데 동행해 태극기의 물결을 보았다. 특히 18세인 맏형이 중학을 졸업하고 군청을 다니다가 면으로 이동되어 와서 맞은 해방이었다.

면에서 그리고 군에서도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영철 형이 해방 1년 전부터 우리는 곧 해방이 된다고 육모 정자에서 열변을 토하든 모습도 기억한다. 형이 중학 초급반일 때 중학교 일본 교장선생이 잘 생기고 공부 잘하고 똑똑한 형을 자신이 일본본국으로 들어갈 때 양자처럼 삼아 가겠다고 했으나 왜 침략자 나라로 양자를 가냐고 형이 거절하였다.

영철 형은 이미 일본의 패망을 간파하고 조국 광복을 위한 준비를 은근히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기에 건국준비위에 관여하고, 이어서 김 구 선생의 노선에도 관여하며 해방을 맞이했다. 그런데 조국은 둘로 갈라지고 이데올로기에 의한 좌우갈등은 끝이 없었다. 아마도 건국준비에서 단일 정부가 아닌 하나 된 정부를 원하는 단체에 연관을 가졌다.

그리고 우리 동네 앞마을에 나와 학렬이 같은 영기라는 분이 있었는데 나이가 55세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우렁찼다. 바로 그 형님이 독립운동 의병장이었다. 수차례 전투에 참가하여 전적을 내기도 하고 패퇴하기도 했으며 일제 말에는 감옥까지 갔다 온 독립의병장이었다.

그 의병장 형님이 지나가면 감히 자리를 비켜서고, 버스를 타도 돈도 내질 않았다. 그러기를 80세가 넘도록 하였고 의병장의 공훈을 인정받아 광복 후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그 노인형님의 댁에 가서 그때 썼던 칼이며 장죽이며 말안장 등을 구경하며 독립운동에 얽힌 얘기를 듣곤 했는데 대단한 의병장이었다.

그런 기개와 의혈이 넘쳐 광복이 되었다니 당연히 만세를 부르며 선봉에 나섰다. 날마다 하얀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마치 그 옛날 의병장처럼 떵떵거리며, 심지어는 주점에서 술을 들고도 돈을 내지 않고 아예 받으려고 하지 않은 그런 위인이었다. 효골 윤씨의 인물이었고 광주의 독립 운동가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집안 당숙한분이 징병에 끌려가 일본으로 갔는데 행방불명이 되었다. 집안은 그동안 참봉할아버지 집안은 일본인들과 친해져 사무실도 내주고 그래저래 친일이 되었고 어른 형님과 우리 맏형은 반일분자가 되어 해방을 맞이했다. 그렇다고 집안끼리이니 큰 갈등은 없었다.

그런데 우리 맏형은 해방공간에서 깊숙한 지하운동까지 벌여 결국 면사무소에서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이는 3년간 군정기간에 건국준비를 위한 좌우익 갈등으로 깊어만 간 것이다. 형은 일찍이 동학운동의 여파에서 평등사상과 양반쌍놈의 구분을 타파하고 오직 한민족으로 원상회복의 광복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형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결국 건국 초에 좌익으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직을 불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형은 오직 하나 된 통일 조국을 바랐는데 이승만 정부는 그런 사상과 주장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공법에 걸어 붙잡아 드렸다.

정부가 들어서고 헌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는데도 형은 22살로 3발의 총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것도 재판도 없이 죽어간 젊은 형이었다. 당시에 형은 면장은 물론 군수까지도 하고 남을 거라는 군민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건국초기 정부는 법을 무시하고 보도연맹 사건 전에 주검으로 내몰았다.

국회는 지난 5월에 과거사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과거사법이 통과됨에 따라 신고를 해놓고 있다. 이처럼 60년 전 광복과 해방은 곧바로 분단으로 이어졌고 남북의 각각의 정부는 60년을 분단 상태로 훌쩍 넘기고 있다. 우리는 반백년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고 있지만 아직도 요원한 우리의 통일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오는 그날이 진정한 광복이 아닐까? 그날이 남북 7천만 민족의 바람이요 기쁨이며 꼭 이뤄내고 말아야 할 우리의 화두다. 그때가 오면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과 이 땅에 독립과 통일과 평화를 위해 희생된 선대들을 진정으로 위로 할 것이다.

우리민족의 최대의 과제는 분단극복에 평화와 통일이다. 이제 6.15선언에 따른 남북화해와 협력이 이뤄지고 남북이 하나 되는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 광복 60년이 아닌 분단 60년의 시급한 과제는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일이다. 우리의 소원은 평화 통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일제에서 해방은 분단을 낳았고 이에 집에서는 22살 형님과 5살 동생을 잃고 당숙 외숙 이모부 등 많은 사람이 재판도 없이 죽어갔다. 아직도 그분들의 영혼을 달래주지 못하고 있다. 광복의 기쁨은 잠시였고 분단으로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가정사다. 이제 과거진실위법에 의하여 명에를 회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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