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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삥아리 새끼들'이라고 부르는 세 살배기 딸아이와 갓 태어난 아들 녀석을 품고 있는 모습이예요. 바람이 있다면 내가 예순이 될때까지도 내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여전히 내 자식들을 '삥이라 새끼들'이라고 불러주었으면 해요.
어머니가 '삥아리 새끼들'이라고 부르는 세 살배기 딸아이와 갓 태어난 아들 녀석을 품고 있는 모습이예요. 바람이 있다면 내가 예순이 될때까지도 내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여전히 내 자식들을 '삥이라 새끼들'이라고 불러주었으면 해요. ⓒ 권성권
“많이 아프제.”
“그럼 안 아프대? 이것 때문에 응치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온 몸이 아파 죽겄다.”
“그러니까 이젠 농사 그만둬요.”
“그만두면 전답을 묵인 대냐? 글고 가만 놀면 누가 먹여 살린 대냐?”
“그럼 엄마가 내 삥아리 새끼들 봐 주고 있으면 되제.”
“그것도 맘처럼 쉬운 것이 아닌께 그러제.”
“그럼 더 아프면 어쩔라고 그런가.”
“아이쿠, 우리 삥이라 새끼들. 민주야, 민웅아, 이리 할미한테 와봐.”

아픈 몸으로는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말라고 해도, 어머니는 막무가내이다. 그런 말을 더는 못하도록 어머니는 세살배기 내 딸아이와 갓 태어난 아들 녀석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내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너무 늦었다는 듯이 곧바로 딸아이와 아들 녀석을 어머니 품에 안겼다. 나도 더 이상은 고집 피울 수가 없어서 그저 아픈 몸으로 두 녀석을 품고 있는 어머니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저녁 무렵이 되었다. 시골 밥상이 다들 그렇듯 신김치에다 된장, 그리고 고추와 젓갈이 다였다. 그래도 나는 내 자식들을 ‘삥아리 새끼들’이라고 부르는 어머니와 함께 맛나게 저녁밥을 먹었다. 물론 효도 밥상으로 어머니 몸에 좋다는 삼치를 사 가지고 가서 밥상에 올려놓았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내 딸아이 입 속에만 자꾸자꾸 넣어 주었다. 당연히 나와 아내는 딸아이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런데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딸아이는 전혀 아랑곳없이 야금야금 다 받아먹을 뿐이었다.

“인자, 방에 가서 잘 자라.”
“여보, 당신이 엄마랑 자고, 나랑 민주는 작은 방에서 잘까.”
“성권이 니가 여기서 자고, 민주 엄마는 민주랑 민웅이를 데리고 넓게 자라고 해라.”
“그래요. 당신이 어머니랑 같이 자요.”
“엄마, 그럴까?”
“….”

작은 방은 여름철 네 식구가 잠을 자기에 그리 넉넉한 방은 아니다. 그렇다고 비좁은 것도 아니었지만 아내는 한사코 나를 어머니 방으로 떠밀었다. 아마도 아내가 등을 떠민 것은 몸이 아픈 어머니 곁에서 잘 돌보며, 그나마 하룻밤이라도 잘 보내라는 그런 신호였던 것 같다. 그 신호를 곧잘 알아차린 나는 어머니 곁에 다가가서, 고름이 잔뜩 묻어 있는 헝겊을 뜯어내고서 새 헝겊을 몸에 붙인 다음, 베개에 머리를 놓았다.

“엄마, 잘 자요.”
“응, 너도 잘 자라. 내일 갈래?”
“응.”
“그럼 고추 밭이랑 논에 약 좀 해 주고 갈래?”
“알았소. 내가 다 해 드릴께.”
“고맙다.”
“뭐가 고맙소. 당연히 해 드려야지.”
“그나저나 니 삥아리 새끼들이 이뿌드라이.”
“예쁘긴 예쁘지요? 내가 봐도 그래요.”
“누굴 닮아서 그런 것 같냐?”
“당연히 엄마 닮아서 그라제.”
“와따매, 너도 웃길 줄 안다이.”

몸이 아프면서도 웃을 줄 아는 내 어머니는 내년이 되고, 그 다음 해가 되더라도 여전히 나를 ‘삥아리’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식들을 향해서는 ‘삥아리 새끼들’이라 부를 것이다. 그런 내 어머니가 밉지 않고 한없이 좋기만 한데, 부디 내가 예순 살이 되어 내 자식들을 장가보내고 시집보내어도 ‘삥아리 새끼들’이라 불러줄 만큼 그때까지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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