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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백두산에서 바라본 조국 산하
새벽녘 백두산에서 바라본 조국 산하 ⓒ 박도
평양공항

비행기에서 내리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평양공항 청사였다. 자그마한 2층 건물의 청사 위 왼편에는 ‘평양’ 오른편에는 ‘PYONGYANG' 그 가운데는 사각형의 사진틀 안에 김일성 주석이 웃고 있는 초상화가 놓여있었다. 1999년 중국 도문에서 북한 남양을 바라보았을 때도, 2004년 봄, 항일유적답사 때 연변조선족자치주 두만 강변에서 북녘의 강양동 옛 일본헌병들의 초소를 바라보았을 때도 빠짐없이 김 주석이 웃고 있었다.

평양공항 청사
평양공항 청사 ⓒ 박도
아니 건물에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를 때 남녀 승무원이나 조종사의 왼쪽 가슴에도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김 주석 배지가 훈장처럼 달려 있었다. 그들뿐 아니라 북녘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어린이를 빼고는 모두가 그 배지를 달고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북녘 땅 곳곳에 내걸린 플래카드의 문안처럼, 김 주석은 돌아가신 게 아니라 살아있었다.

평양공항 청사 앞에서 남쪽 민족문학작가대회 참가단들이 기념사진을 찍고자 정열하고 있다.
평양공항 청사 앞에서 남쪽 민족문학작가대회 참가단들이 기념사진을 찍고자 정열하고 있다. ⓒ 박도
평양공항은 고즈넉하기 그지없었다. 수도의 공항이라기보다 중국 연길이나 심양공항보다도 한적하고 남녘의 중소도시 공항처럼 비행기도 차도 사람도 드물었다. 공항 청사 앞면에는 “민족작가대회 참가자들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공항 청사 앞 플래카드 앞으로 가서 단체 기념촬영도 하고 황석영 작가의 도착성명서 낭독도 있었다.

북녘 보도진, 특히 사진기자들은 자유분방한 남녘 작가단을 한 자리에 모아 기념 촬영하고자 더운 날씨에 진땀을 흘렸다. 그가 고안해 낸 말이 ‘김치’였는데 그의 ‘김치’‘신 김치’란 말이 큰 효험이 있어서 그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정말 ‘김치’는 우리 겨레의 입에 밴 음식이다. 외국을 여행하면서 산해진미를 앞두고도 우리의 김치를 먹어야 입이 개운하다. 그래서 미국 워싱턴 한복판 슈퍼에도 우리의 김치가 진열되어 있다.

평양거리의 시민들(인민문화궁전 앞)
평양거리의 시민들(인민문화궁전 앞) ⓒ 박도
이제는 만남의 기쁨을 노래해야

13: 20, “이제는 남북의 작가들이 헤어짐의 슬픔에서 만남의 기쁨을 노래해야 할 즈음”이라는 황석영 작가의 도착성명을 남긴 채 공항 청사로 들어가서 짐을 찾고는 입국수속을 밟았다. 내 예상과는 달리 검색대를 통과하는 걸로 소지품 검사는 끝났다. 공항 직원이 “선생님,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하기에 그가 내민 손을 잡자 마치 농사꾼의 손마냥 거칠했고 얼굴도 알맞게 그을렸다.

청사를 나오자 온통 숲이었다. 그 숲의 나무들이 조금도 낯설지 않은 소나무요, 마루나무요, 아카시아들로 매미소리가 들려오는 칠월 한더위 속의 나른한 오후 남녘 한 지방 소도시의 공항으로 착각케 했다.

평양시내의 건물과 플래카드
평양시내의 건물과 플래카드 ⓒ 박도
14: 05, 우리 일행은 네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공항을 출발하였다. 나는 4번 버스를 탔는데 안내원이 황원철(36)로 소속이 작가동맹의 소설가라고 했다. 그는 “민족분열 60년만의 만남”이라고 감격해 하면서 마이크를 잡고는 차내에서는 사진촬영을 하면 안 된다는 주의와 함께 차창 밖 풍경을 안내해 줬다.

평양공항에서 평양시내로 들어가는 길조차도 한산하기 그지없다. 마치 내가 사는 강원도 산골 어느 지방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이따금 맞은편에서 차가 지나고 갓길에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데 자전거 앞에다가 아이들 태우고 달리는 게 내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황 작가는 지금 달리는 길이 9.9절 거리로 인민군창설 50돌 기념으로 만든 바, 자기도 나흘간 노력 봉사했다고 자랑했다. 도로 가의 논밭에는 벼 옥수수 콩들이 자라고 개울에는 벌거벗은 아이들이 멱을 감는 게 여간 평화스럽지 않았다. 도로 옆이나 낮은 산에는 무궁화 꽃도 심심찮게 보였다. 가까이에 있는 안내원에게 저 꽃은 남녘 국화라고 말하자, 자기도 알고 있다면서 오래전부터 거기에 피어 있었다고 말했다.

아직도 북녘은‘고난의 행군’ 중

잠시 후 지나는 곳이 금수산기념궁전이었다. 이곳은 김일성 주석이 잠든 곳으로 마이크를 든 황 작가의 억양이 갑자기 엄숙해졌다.

“1994년 7월 8일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어떤 신문은 지구의 무게가 가벼워졌다고 서거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버스가 빠른 속도로 지나치기에 자세히 보지는 못하였지만 우람한 건물에 경비가 삼엄하고 문은 황금빛으로 번쩍거렸다.

대동강 쑥섬 사적지(남북연석회의)에서 열변을 토하는 안내원
대동강 쑥섬 사적지(남북연석회의)에서 열변을 토하는 안내원 ⓒ 박도
곧 김일성종합대학, 영생탑, 개선문, 천리마동상, 만수대 동상이 눈에 띄었다. 얼른얼른 눈에 보이는 여러 건물에 나붙은 몇 가지 구호만 옮겨본다.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 만세!”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선군 령도” “결사옹위”……

이번 방북단 실무자들이 사전에 북측과 잘 조율하여 김일성, 김정일 양 김씨의 동상이나 사진에 가볍게 지나쳐도 괜찮다고 양해되었기에 참배 여부에 부담을 덜게 되었다.

한산한 거리, 칙칙한 고층건물 온통 낡은 궤도전차와 무궤도전차…. 핏기 없는 사람의 얼굴처럼 어딘가 궁색해 보였다. 안내원은 아직도 북녘은‘고난의 행군’ 중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만난 동포가 충고했다. “서로 화합하지면 서로 아픈 곳은 가급적 건드리지 말고, 생색내지 말고 도와주고, ‘구존동이(求同存異)’, 곧 차이점은 뒤로 접고 공통점 중심으로 일을 벌려나가라”고.

겉의 북녘, 그것도 단 한 번 차창으로 보고서 내 섣부른 감상을 함부로 말하는 게 나이 값을 못하는 것 같아서 가능한 내 감정을 자제하면서 본대로만 쓰고자 한다. 입 달린 사람이 저마다 한 마디씩 다 말하면 배가 산으로 가리라. 남과 북이 통일로 가자면 서로 그 단점까지도 껴안고 뜨거운 민족애로 용해시켜야 될 일이 아닌가.

백두산에서 바라본 조국강산(2)
백두산에서 바라본 조국강산(2) ⓒ 박도

덧붙이는 글 | ‘고난의 행군’: 김일성 주석 사망 후 거듭된 자연재해와 언저리 사회주의국가의 몰락, 강대국들의 경제압박조치로 북한이 식량 전기 등 경제적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말함.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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