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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 보니 길을 걷는 일은 단순히 걷는 일만은 아니었다. 길을 걷는 것은 나를 살피는 일이었다. 나를 살피는 일은 철저하게 아픈 일이다. 백두대간을 걸으며 백두대간 마루금에 땀을 흘리며 걸는다. 산길은 말끔한 신사처럼 걸을 수 없다. 오르면 내려가야 한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땀을 흘려야만 걷는다. 걷는 걸음의 숫자만큼 보폭만큼 등에 진 배낭의 무게만큼 땀을 흘려야만 걷는다. 뒤돌아 본 길은 땀으로 적신 길이다.

뒤돌아 본길은 곧은길도 평탄한 길도 없다. 항상 험한 길이었으며 지치고 죽을 만큼 되어도 가야할 길이 눈앞에 펼쳐지는 그런 길이다. 그 길을 이만큼 왔다. 이만큼 와서 뒤돌아 보는 내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왜일까? 나는 서서히 산이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다. 산에서 먹고, 산에서 자고, 산길을 걸으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산 속의 사람, 산 안의 사람, 산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산에서 만난 당일 산행하는 누군가 묻는다.

"산에서 혼자 자면 무섭지 않냐고?"
"혼자 산을 걸으면 무섭지 않냐고?"
"혼자 산에서 밥을 먹으면 외롭지 않냐고?"

그때 나도 모르게 이런 대답이 나온다. 전혀 생각한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툭 하고 나온 답에 나도 놀란다.

"산은 무섭지 않습니다."
"다만 산 아래 세상이 무섭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산이 들어 있었다.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걸음의 반복이지만, 걸음은 내게 배움과 깨달음을 주었다. 나는 걷는 동안 산에게서 배웠다. 누군가 나에게 속삭여 주는 사람도 없고, 누구도 나에게 강요한 적도 없다. 하지만 산길을 걸으며 나는 깨달았고, 배웠으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돌아봄은 돌아본 만큼 나를 알아가게 만들었다.

백두대간은 내가 선택해서 시작한 일이다. 누구의 간섭도 누구의 지시도 받고 가는 길이 아니다. 다만 나는 도전하고 싶었다. 도전은 이제 변화로, 변하고 싶은 욕망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를 변화 시키고, 내 삶을 바꾸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돌아 보니 나는 꽉 막힌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현실, 세속에 푹 빠져 살아가는 나 아닌 것의 연속된 상황. 처음엔 백두대간에 도전하기 위해 걸었다. 지금은 나에게 도전하기 위해 걷고 있다. 나는 변하고 있었다.

나는 백두대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을 하고 있다.

▲ 덕유산의 밤하늘
ⓒ 정성필
산에 있는 나 홀로의 시간 동안 나는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처음엔 외로웠다. 무서웠다. 처음엔 사람만 만나면 반가웠다. 사람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이젠 시원한 바람이 더 반갑다. 처음엔 밤이, 어둠이 무서웠지만 이젠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이 더없이 반갑고 아름답다. 처음엔 맷돼지나 짐승들을 만날까 봐 무서웠지만, 이젠 멀리 몰려오는 시커먼 비구름이 더 무섭다.

처음엔 고기나 패스트푸드처럼 기름진 음식 없인 못살았지만 이젠 시원한 물 없인 살 수 없다. 처음엔 밝은 전깃불 아래서만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줄 알았지만 이젠 촛불 아래서 일기도 쓰고 성경도 읽는다. 처음엔 반찬 없는 밥, 김치 없는 밥은 먹을 줄 몰랐지만 이젠 소금 하나만 있으면 밥도 맛나게 먹는다. 처음 시작할 때는 외로움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인줄 알았지만 지금은 외로움은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을 때 온다는 것을 알았다.

산에 왜 가냐고 물으면 "외로워지려고 산에 간다"는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산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충분히 외로웠고 앞으로도 외로울 것이다. 이젠 외로움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끝까지 못가고 포기하는 게 무섭다. 외로움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도전을 포기하는 게 무섭다. 이젠 돈 많이 못 버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변해야 하는 내 자신이 변하지 못하는 게 무섭다. 변해야 하는 상황이 변하지 않는 게 무섭다. 변해야 하는 모든 것들이 전혀 변하지 않고 딱 버티고 있음이 더 무섭다.

물이 없어 수건에 물 조금 묻혀 얼굴과 손, 발을 문질러 닦는다. 내일 마실 물 때문에 미리미리 아껴둔다. 혹 신풍령까지 물이 없다면 큰 낭패이기 때문에 있을 때 아껴 두어야 한다. 일기를 쓰다 별을 보러 나간다. 하늘에선 별이 쏟아진다. 바늘 한 땀 들어갈 틈도 없이 별이 빼곡하다. 추워도 좋다. 별을 보다 기도를 한다. 나를 변화 시켜 달라고. 간절히. 별이 온통 등과 머리로 쏟아지는 듯하다. 한참을 지나니 몸이 으스스 떨려 온다.

텐트로 들어가 침낭을 뒤집어 쓴다. 잠이 들기까지는 오랜 시간 걸려야 했다. 몸은 피곤할 대로 피곤했지만 너무 추웠다. 침낭 안에서 옷이란 옷은 다 입고 들어가 내 체온으로 버티는 데도 견딜 수 없었다. 빨리 아침 햇살이 와 축축하고 추운 이 몸을 뽀송뽀송하게 말려 주기를 바랬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아침 햇살이 텐트 위에서 한참을 뛰어 다니고 있었다. 새소리가 들렸고, 바람 소리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도 들렸다. 추위에 꽁꽁 얼었던 몸을 녹이려고 햇빛 가득한 능선으로 올라간다. 이미 태양은 나무도 돌도 길도 다 따스하게 만들었다.

몸이 녹자 나는 주먹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천막을 걷고 배낭을 꾸린다. 일상의 반복이다. 아침 햇살이 더 뜨거워지는 한낮의 태양으로 바뀌기 전에 나는 서둘러 대간 길을 가야 한다. 너무 뜨거우면 쉽게 지쳐 가는 길이 힘들다. 간밤의 행복했던 밤하늘의 추억과 아름다웠던 노을의 그림을 내 기억에 곱게 접어 넣고 길을 걷는다.

▲ 송계사 삼거리 이정표
ⓒ 정성필
송계사 삼거리에서 대간 길은 우측으로 90도 정도 꺾여 들어간다. 송계사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그냥 북덕유산, 향적봉으로 가게 된다. 향적봉의 아름다움은 다음에 보기로 하고 신풍령을 향해 간다. 신풍령 가는 길은 지도상에 6시간 정도로 표기되어있다. 여유있게 가도 될 듯하다. 게다가 지도상으로는 내리막이니 그리 힘들 것 같지는 않은 듯하다.

▲ 걸음은 정직하다 돌아보면 걸은만큼 보인다/멀리 덕유능선이 보인다
ⓒ 정성필
백암봉에서 귀봉을 거쳐 1302봉을 지나 대봉까지 가서 내려서면 신풍령이다. 지도상에 있는 대로 그대로 길만 따라 가면 된다. 처음 출발은 좋았다. 귀봉에서 멀리 보이는 덕유능선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대한민국에서 1000미터가 넘는 능선으로 하루 길을 걸을 수 있는 산을 몇 개 안된다. 그 중 하나가 덕유능선이다. 그 덕유능선을 어젠 걸으면서 행복했고 오늘은 멀리서 보며 걷는다. 능선은 직선처럼 주욱 뻗었다.

그 능선의 끝에 장수덕유와 남덕유가 보인다. 대간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능선 능선마다 걸음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왔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능선은 장쾌하고 거대했다. 걸음은 정직했다. 걸은 만큼 앞으로 나가고 뒤돌아 보면 걸은 만큼 보인다. 귀봉을 지나 1302봉 가는 길 헬기장으로 꽃이 가득하다.

▲ 꽃밭
ⓒ 정성필
봄꽃. 노랑색의 물결이 작지만 편편한 헬기장으로 가득하다. 바람이 불면 바람에 따라 춤을 추는 작은 꽃들, 잠시 그곳에 앉아 쉰다. 사탕을 꺼내 먹는다. 걷는 일은 칼로리 소모가 많은 일이어서 수시로 사탕이나 초콜릿, 과자 등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먹어야 간다. 칼로리가 떨어지면 걷는 일은 지옥이 된다.

나비가 꽃 사이로 날아다닌다. 햇볓은 따스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간밤에 잠을 못잔 탓인지 잠간 머무는 사이 잠이 온다. 스르륵, 붙잡는 사람도 말리는 사람도 없지만 못이기는 척 잠에게 내 몸을 내어 준다. 꽤 잤나 보다. 일어나 보니 배가 고프다. 간밤에 만들어 놓은 점심을 먹는다. 반찬은 없다. 고추장에다 근처에서 뜯은 나물 몇 가지.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고픈 배를 채울 수 있는 밥이 있고, 그 밥을 맛나게 먹을 수 있는 나물이 있고, 그 밥을 먹고 난 후 마실 수 있는 물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 이정표
ⓒ 정성필
밥을 먹고 일어선다. 조금만 가면 1302봉이다. 그런데 가는 길이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하다. 신풍령까지는 긴 거리가 아닌데 길이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이렇게 오르내리고 하면 오늘 넘고 넘는 작은 봉우리는 아마 수십 개는 될 듯하다. 벌써 온 몸은 땀에 젖었다. 간밤에 씻지 못해 끈적끈적해졌던 몸이 새로 솟아나는 땀이 씻어준다. 머리부터 발까지 온몸은 이미 땀으로 젖었다. 그 위로 땀이 또 흐르면서 적시고 또 흐르고 하다보면 어느새 땀은 끈적끈적해지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변한다.

아침에 추위로 얼마 못잔 잠 때문에 얼굴이 잔뜩 부은 것처럼 둔했으나 땀을 흘리면서 얼굴의 붓기는 가라앉은 듯하다. 바람이 시원하다. 고도가 높은 산일수록 바람이 시원하다. 대봉에 도착할 때 이미 시간은 다섯 시를 넘기고 있었다. 운행 속도가 너무 느린 건지 아니면 지도상의 거리와 시간이 잘못 표시된 건지, 알 수 없다. 좌우간 신풍령 내려가는 길은 나오지 않고 지루하게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만 반복된다.

몸도 서서히 지쳐간다. 배낭끈이 어깨를 죄어온다. 어깨가 너무 아파 배낭끈을 쇠골에 옮겨 놓았다가 쇠골이 아프면 어깨 바깥쪽에 걸치기도 하다 그래도 아파 오면 손으로 배낭끈을 치켜 올려 손으로 잡고 가기도 한다. 그래도 얼마나 행복한가? 가야할 길을 가는 사람은 그 자체가 행복이다. 나는 지금 가야할 길을 간다. 가고 있다. 걷고 있다. 자기 길이 아닌데 가는 사람처럼 힘든 길을 가는 사람은 없다. 나는 지금 목표가 있고 가야할 길이 있다. 그 길을 걷는 나는 지금 비록 어깨가 아프고 체력이 바닥이 났어도 행복한 길을 가는 중이다.

힘들면 여기서 쉬고 텐트를 치면 되는 것, 꼭 반드시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법칙도 없다.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쉬고, 가다 쉬다 힘들면 잠자고, 그래도 힘들면 나를 들여다 보면 된다. 편할 때, 좋을 때, 힘이 넘쳐 날 때 나를 보면 잘 안 보인다. 그러나 힘들 때, 어려울 때, 외로울 때 나를 들여다 보면 보인다.

가는 길에 나물하는 분들을 또 만난다. 그분들이 참을 드시다가 나를 보며 놀란다. 내 몰골이 말이 아니다. 게다가 배낭도 크다. 내가 먼저 웃으며 인사드리고 신풍령 가는 길을 물어 본다. 가르쳐 준다. 그리고 배낭 내려 놓고 참을 먹고 가라한다. 몇 숟갈 얻어먹는다. 꿀맛이다. 인사를 드리고 간다. 가다 또 혼자 다니는 약초꾼을 만난다. 나는 그 사람을 얼마간 따라가며 이것저것 배운다. 맷돼지를 만나면 그 자리에 서 있어라. 절대 싸우겠다는 몸짓을 하지 마라. 혹 그 멧돼지가 임신을 했거나 숫퇘지이면 일단 배낭을 벗고 가장 가까운 곳의 굵은 나무를 찾아라. 그리고 거기로 올라가라는 이야기부터, 물 찾는 법도 배운다.

▲ 신풍령(빼재) 비석
ⓒ 정성필
하지만 그의 걸음은 굉장히 빠르다. 내가 좇아가기엔 나는 너무 느린 데다 배낭도 무거웠다. 그는 나와 헤어지면서 신풍령(빼재)이 멀지 않았다고 격려해 준다. 나는 힘을 내 얼마 남지 않은 길을 간다. 이미 길에 산그림자가 드리운다. 한참을 내려 가다보니 커다란 송전탑이 나온다. 거기서부터 길이 끊겼다. 길을 찾다보니 우측으로 길이 나있다. 내려가니 신풍령이라는 돌비석이 나온다.

다 왔다. 몸은 다시 지칠대로 지쳤다. 백두대간 정보에서는 이곳에 휴게소가 있다 표시되어 있다. 대간꾼들은 신풍령 휴게소에서 물도 보충하고 필요한 식량도 보충할 수 있을 거라고 나왔다. 게다가 식당까지 있어서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 했다. 그 기대만큼 조급한 마음으로 신풍령 휴게소로 내려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유리로 만들어진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이미 안은 폐허처럼 변했다.

휴게소는 이미 폐업을 했고 주유소도 영업을 안 한 지 오래 되어 보인다. 식량 보급을 하려고 모든 것을 비웠는데 큰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해가 지기 전에 텐트를 쳐야한다. 텐트 칠 자리를 찾았다. 휴게소 처마 밑에 친다. 물을 찾아 돌아다녔다. 없다. 다만 맞은 편 언덕 위에서 흐르는 물이 있다. 물의 양이 많지 않아 물이 흐르는 자리에 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물이 고이면 코펠에 퍼 담아 물을 받았다. 코펠이란 코펠과 물통이란 물통은 온통 다 물로 가득 채웠다. 마치 물에 굶주린 사람처럼.

씻을 곳을 찾았다. 배고픈 것보다는 씻는 게 급했다. 휴게소 화장실을 갔다. 휴지에 온통 난리가 아니다. 나는 당연히 폐휴게소이니 전기도 물도 안 나올 줄 알고 포기했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전등의 스위치를 누르자 불이 들어온다. 환하다. 물을 틀어 보니 우측 세면대에서 물이 나온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선 바닥에 널린 휴지와 오물을 치우고 씻기 시작한다. 피로와 땀으로 축축 늘어졌던 피부에 물이 닿는 순간, 피부가 탱탱해진다. 나는 오래 오래 물을 부어주고, 문질러 주고 깨끗하게 닦아 준다. 행복하다. 씻고 난 후 쌀을 씻어 앉힌다. 이미 어둠은 땅거미처럼 내려앉았다. 버너의 불이 환하게 푸르다. 버너의 불을 보며 앉아있는데 산에서 사람이 내려온다. 시커먼 남자 둘이 탑처럼 높은 배낭을 메고 내려온다. 누군가?

덧붙이는 글 | 2004년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의 백두대간 무지원 단독 연속종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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