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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과 그의 친구
웬과 그의 친구 ⓒ 고기복
얼마 안 있어 그들은 작업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인부들의 모습은 작업복을 입고 있을 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그중 한 명이 자전거를 끌고 가면서 밝은 표정으로 뭐라고 말을 거는데, 짧은 베트남어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콩 비엩 띠엥 베트남(베트남어 몰라요)"
"짝 콩? &$%&*$%@#"(정말 몰라요? 그런데 그 말은 어떻게 알아요?/기자주)

말을 걸었던 사람은 많아 봐야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학생이었는데, 자신의 이름을 웬이라고 했다. 그런데 웬이 끌고 가던 자전거를 가만히 보니, 브레이크가 없었다. 브레이크가 없는데 위험하지 않으냐고 손짓으로 물어보았다.

"콩 사우(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다고 답한 웬은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레몬 정도 크기의 파란 과일이었다. 과일 이름을 말하는데 생소하여 알아듣지 못했다. 웬은 웃으면서 먹어보라고 권하더니, 자신도 갖고 있던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웬을 따라 그 딱딱한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자동적으로 눈꼬리가 올라갈 만큼 시었다. 그 표정에 웬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말은 제대로 통하지 않아도 서로 탐색전이 시작되었다.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에 '한국에서 왔다'고 답하자, '한국에서 왔느냐'고 되묻는다. 웬이 끌고 가던 자전거 안장 뒤에 비닐봉지로 싼 책인 듯한 물건에 눈길이 갔다. 손으로 가리키며 무엇인지를 물어 보았다.

웬은 대답 대신 비닐봉지를 펼쳐 보였다. 만화책이 아닐까 하는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달리 교과서였다. 수학책과 몇 권의 책들 사이에 영어책이 있어서 꺼내 들자 웬은 갑자기 "굿모닝"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영어공부가 시작되었다.

나는 손짓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지금은 "굿모닝"이 아니라, "굿에프터눈"이라 해야 한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굿모닝"은 잠을 자고 난 후 아침에 하는 인사라고 설명했다.

웬은 '신%&*상'이 '굿모닝'이고, '신%&*또이'가 '굿에프터눈'이냐고 묻는다. 짧은 베트남어지만 그런대로 설명이 된 듯하여 고개를 끄덕여 줬더니 환하게 웃는다. 그 모습이 천진난만하기 그지없었다.

나 역시 웬에게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서로 소통하기가 쉽지 않아 마냥 웃고만 있었다. 마침 그때 킴의 동생이 다가와서 통역을 해줬다. 통역을 통해 웬이 아침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일을 하고 받는 돈이 1만 6천 베트남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돈으로 천원 조금 넘는 돈이었다.

한참 공부해야 할 시기에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하고도 환하게 웃는 모습이 여간 보기 좋은 게 아니면서도 가슴 한 편이 짠하였다. 얘기를 마치고 책을 빌렸는지 샀는지 모르지만 일을 끝내고 집에 가서 공부를 하려고 소중하게 비닐봉지에 다시 꼭꼭 싸는 웬의 모습이 기특하게 여겨졌다.

그 다음날 나는 기분 좋은 인사를 받았다. "굿모닝!" 웬은 '신%&*상'이 '굿모닝'이고, '신%&*또이'가 '굿에프터눈'이 맞냐고 물어왔다. 나는 웬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답했다.

"스뫁!(No !!)"

웬에게서 과거 섬유공장같은 곳에서 장시간 중노동을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꾸리면서도 학업을 병행한, '공순이'라 불렸던 우리 시대의 누님들의 모습을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할 일이었는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6월 20일부터 7월 2일까지 귀환이주노동자 실태조사 과정에서 겪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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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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