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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약재로 찜질한 피리조림 드세요
ⓒ 이종찬
사람이 제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양식을 하기가 어려운 민물고기가 피리(피라미)다. 그 때문에 피리는 시장에서 흔히 사 먹을 수 있는 그런 물고기가 아니다. 피리는 티없이 흐르는 맑은 강이나 호수, 시냇가에 가야만 떼지어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그 날씬한 모습을 구경할 수가 있고, 맛도 즐길 수 있는, 요즈음 보기 드문 귀한 물고기다.

표준어로 '피라미'라 불리는 피리는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독특한 이름이 붙어 있다. 개리, 날치, 피래미, 피라지, 피리, 날치 등. 이는 그만큼 우리 나라 맑은 강이나 호수, 시냇가 등지에서 흔해 빠졌던 물고기가 피리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산천의 오염으로 예전에 그렇게 흔했던 피리를 구경하기도 그리 쉽지 않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 앞을 휘돌아 나가는 시냇가에는 피리가 참 많았다. 어찌나 피리가 많았던지 철사를 대충 구부려 만든 낚시바늘에 보리밥알을 끼워 시냇물에 담그기만 하면 금세 낚여 올라오는 게 피리였다. 하지만 아무도 피리를 먹지는 않았다. 그저 손맛으로 피리를 낚았고, 낚은 피리는 곧바로 닭에게 던져 주었다.

그때 우리 마을 아이들은 시냇가 곳곳에 떼지어 몰려다니는 피리, 소쿠리로 대충 뜨면 소쿠리 가득 파닥이던 그 피리를 '좆쟁이'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마도 피리의 날씬하고도 길쭉한 모습이 어린 아이의 고추를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으리라 어림 짐작할 뿐이다.

피리에 대한 옛 기록은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 선생의 <전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어지>에 따르면 피리는 "비늘은 희고 등은 검으며 청색을 띠고 있고, 눈에는 빨간 점이 있다. 배는 약간 둥글고 꼬리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약해져서 칼 모양을 한다. 꼬리지느러미는 둘로 갈라져서 제비 꼬리와 같다. 큰것은 3∼4치(10cm 내외)이고 일명 필암어(必巖魚) 라고 한다"고 적혀 있다.

▲ 지리산 덕천강변에 자리잡은 구만횟집
ⓒ 이종찬

▲ 덕천강에서 갓 잡아올린 피리떼
ⓒ 이종찬
피리의 산란시기는 6~8월이다. 피리의 수정란은 2~4일만에 자잘한 알껍질을 깨뜨리고 나오는데, 그때의 몸 길이는 바늘처럼 얇은 4.4mm 정도다. 한 가지 재미난 것은 산란기가 다가오면 피리 수컷의 몸빛이 담홍색 무늬를 띠는데, 이러한 혼인색을 띠는 피리의 수컷은 몸빛이 붉다고 하여 '불거지'라 부르기도 한다는 점이다.

"피리는 뼈가 아주 연한 물고기라서 튀김을 해 먹거나 쪼리개(조림)를 주로 해 먹어예. 보통 정어리나 고등어는 비린내가 심하기 때문에 그냥 소금을 치고 후춧가루를 뿌려 구워먹지만 피리는 비린내도 거의 나지 않고 향긋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나거든예. 무더운 여름철에는 피리 이기 보약 아입니꺼."

지난달 25일(토) 오후 1시, 나의 지리산 길라잡이 정규화(56) 시인과 함께 찾은 민물회 전문점 '구만횟집'(경남 산청군 단성면 창촌리 762번지). 이 집 주인 강복덕(여, 52) 씨는 "나이를 먹을수록 피리를 많이 먹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귀띔한다. 피리에는 뼈와 치아에 좋은 칼슘뿐만 아니라 노화를 방지하는 DNA가 아주 많이 들어 있다는 것.

강씨는 "피리는 고혈압, 동맥경화, 뇌졸중, 당뇨병 등 각종 성인병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몸 속의 콜레스테롤을 낮춰주기 때문에 비만에도 아주 좋다"며 입에 침이 마른다. 특히 이곳 피리는 그냥 식수로 떠먹을 수도 있는 맑은 덕천강에서 잡기 때문에 완전 자연산이자 무공해라는 것이다.

지리산 깊은 산골짜기를 휘감아 흘러내리는 수정 같은 물빛의 덕천강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30년 전통의 구만횟집. 이 횟집 들머리에 들어서자 싱싱한 피리가 가득 담긴 수족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수족관 안에서 거품을 보글보글 피어올리며 날렵하게 헤엄치고 있는 피리떼는 어릴 때 내가 보았던 그 '좆쟁이'가 분명하다.

▲ 피리는 노화방지뿐만 아니라 여름철 원기회복에 아주 좋다
ⓒ 이종찬

▲ 피리는 지역에 따라 개리, 날치, 피래미, 피라지, 피리, 날치 등으로 불리운다
ⓒ 이종찬
물끄러미 피리떼를 바라보며 마악 어릴 적 추억 속으로 잠겨 드는데, 어디선가 한약 달이는 내음이 코끝을 자꾸만 맴돈다. 기자가 강씨에게 이 집에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샐쭉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그리고 턱짓으로 장작불이 타닥타닥 불티를 피워올리고 있는 시커먼 가마솥을 가리킨다.

"저희 집에서는 피리조림이나 메기탕을 만들 때 네 가지 한약재를 넣은 한약 달인 물을 사용하지예. 백출과 천궁, 숙지황, 당귀를 넣고 달인 물을 다싯물로 사용하면 고기의 맛이 향긋하면서도 뒷맛이 아주 깊어진다 아입니꺼. 그라이 저희 집에서 만드는 피리조림이나 메기탕을 먹는 것은 보약을 먹는 거나 꼭 같지예."

강씨에게 소주와 피리조림을 시켜놓고 평상에 앉아 덕천강의 맑은 물빛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강씨가 소주 두어 병과 된장에 박은 먹음직스러운 풋고추를 상 위에 올린다. 피리조림이 나오려면 제법 기다려야 하니 그동안 풋고추를 안주 삼아 소주로 입가심이라도 하고 있으라는 투다.

구수한 된장이 덕지덕지 묻은 풋고추를 한 입 베어물자 짭쪼롬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혀끝을 톡톡 쏜다. 어릴 때 입맛 없다고 하면 어머니께서 장독대에서 몇 개 꺼내주시던 그 풋고추의 알싸한 맛, 어머니의 손맛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풋고추를 안주 삼아 소주 한 잔 들이키며 바라보는 덕천강의 물빛은 소줏빛보다 더 맑다.

그렇게 소주 한 병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을 즈음, 강씨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피리조림을 상 한가운데 올린다. 따라나온 김장김치, 깍두기, 고사리나물, 콩나물, 물김치 등 밑반찬도 깔끔하다. 그중 지난 겨울 땅에 묻어두었다가 지금 꺼냈다는 김장김치의 시큼하면서도 씹을수록 달착지근하게 감겨드는 맛은 정말 끝내준다.

▲ 비만에 시달리는 여성은 피리를 자주 먹는 것이 좋다
ⓒ 이종찬

▲ 어른 손가락 굵기만한 피리는 통째 씹어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 이종찬
한약재를 우려낸 다싯물로 만든 피리조림(2~3인분 3만원). 과연 한약 달인 물에 온몸을 담궈 찜질한 피리조림의 맛은 어떠할까. 어른 손가락 굵기만한 피리 한 마리 젓가락으로 집어 접시에 담아 살을 발라내고 있을 때 강씨가 쌩긋 웃으며 "피리조림을 처음 먹어보는 갑지예" 한다. 피리는 뼈를 발라내지 말고 머리째 씹어 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강씨의 말처럼 살을 발라내던 피리를 머리째 한 입에 넣자 향긋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혓바닥을 끝없이 헤집는다. 입 속을 부드럽게 휘감고 도는 피리를 잘근잘근 씹자 몇 번 씹기도 전에 피리의 뼈가 물렁뼈처럼 잘게 부서지면서 나도 모르게 목구녕을 타고 미끄럼 타듯 스르르 넘어가버린다.

소주 한 잔 입에 털어넣고 고소하고 달착지근하게 감겨드는 피리를 씹고 있으면 마치 지리산의 매콤한 여름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피리를 게 눈 감추듯 먹다가 입 속이 매콤해질 때마다 떠먹는 새콤달콤한 물김치의 시원한 맛도 일품이다. 소주 한 잔 삼키고 피리 한 마리, 소주 한 잔 삼키고 피리조림에 든 무 한 조각, 소주 한 잔 삼키고 피리조림에 든 감자 한 조각.

어느새 소주 서너 병이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다. 다시 소주 한 병 시켜놓고, 자작하게 남아 있는 피리조림 국물에 밥 두어 공기 엎어놓고 참기름과 김가루를 뿌려 비벼먹는 그 맛도 그만이다. 게다가 그 비빔밥 위에 잘 익은 김장김치 한 조각 올려 먹으면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어진다.

▲ 지난 겨울 땅에 묻었다가 꺼낸 김장김치의 시큼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이 끝내준다
ⓒ 이종찬

▲ 피리조림을 먹으며 바라보는 덕천강의 맑은 물빛은 소줏빛보다 더 투명하다
ⓒ 이종찬
"제가 어릴 때는 까닭도 없이 몸이 자꾸 붓거나 여름철 땀을 많이 흘려 몸이 허약해지면 피리를 잡아다가 생강과 마늘을 넣고 물에 푹 고아서 그 뽀오얀 국물을 약으로 먹었지예. 저희 집은 집 앞에 흘러내리는 맑은 덕천강에서 피리를 잡고, 저희들 밭에서 직접 기른 무공해 채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자연의 맛 그대로라예."

피리조림은 무, 감자와 찰떡궁합
조리를 할 때 술, 식초 약간 뿌려야 뼈 부드러워져

▲ 여름철 보양식 피리조림
ⓒ이종찬

재료/ 피리, 무, 감자, 숙주, 생강, 마늘, 대파, 양파, 붉은 고추, 매운 고추, 고춧가루, 된장, 소금, 참기름, 제피가루, 방아잎, 다신물(백출, 천궁, 숙지황, 당귀)

1. 가마솥에 백출, 천궁, 숙지황, 당귀를 넣고 찬물을 부은 뒤 4~5시간 우려낸다.

2. 맑은 강에서 갓 잡은 싱싱한 피리의 배에 작은 칼집을 내고 살짝 눌러 내장을 빼낸 뒤 비늘을 긁어낸다.

3. 냄비에 넓적하게 썬 무와 감자를 깔고 손질한 피리를 얹는다.

4. 한약재를 달인 다싯물에 된장과 고추장, 소금, 송송 썬 대파, 빻은 마늘, 통마늘, 생강을 넣고 참기름을 3~4방울 떨어뜨린 뒤 센불에서 팔팔 끓인다. 이때 먹다 남은 술(아무 술이라도 좋다)을 약간 뿌려주면 비린내가 사라진다.

5. 냄비에서 김이 피어오르면 미리 삶아놓은 숙주를 얹고 송송 썬 붉은 고추, 매운 고추, 대파, 고춧가루, 비껴쓸기한 양파를 얹어 중간불에서 자작하게 끓인다.

6. 냄비에서 다시 한 번 김이 피어오르면 방아잎을 올리고 식초와 제피가루를 뿌린 뒤 물김치, 깍두기 등과 함께 상 위에 차려낸다.

※맛 더하기/피리조림을 할 때 식초를 살짝 뿌리면 생선의 근육(단백질)이 단단해져 살이 으스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피리의 뼈까지 무르게 한다. / 이종찬 기자

덧붙이는 글 | ☞가는 길/서울-대진고속도로-단성나들목-시천쪽 10km-구만리-구만횟집(055-972-5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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