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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선생이 후학들을 기르며 말년을 보낸 산천재
남명 조식 선생이 후학들을 기르며 말년을 보낸 산천재 ⓒ 이종찬

천 석들이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네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까

-남명 조식, '제덕산계정'(題德山溪亭) 모두


아무리 샅샅이 훑어보아도 늘 낯설고 새롭게 다가서는 산. 아무리 오래 바라보아도 그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산.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바뀐다는 산. 저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하늘을 희롱하는 듯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 온갖 짐승과 풀벌레를 키우며 곳곳에 가없는 깊은 골짜기를 비밀스러이 숨겨놓은 산.

지리산(智異山). 조선 중기 대학자 남명 조식 선생은 덕천강변 산천재에 앉아 천왕봉(1915m)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남명은 천왕봉이 하늘에 맞닿아 있기 때문에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다고 했다. 천 석들이 종도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듯이. 그렇다면 저 웅장한 지리산은 영원히 울지 않는단 말인가.

그래. 어쩌면 남명은 죽을 때까지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지리산 천왕봉이 되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남명은 이미 하늘과 땅의 이치를 모두 깨치고, 속세의 희로애락에서 모두 벗어나 스스로 천왕봉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천왕봉이 되어 아귀다툼으로 시끄러운 이 세상을 바라보며 제 홀로 빙긋이 웃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남명은 이곳에 앉아 천왕봉을 오래 바라보았다고 한다
남명은 이곳에 앉아 천왕봉을 오래 바라보았다고 한다 ⓒ 이종찬

남명에게 공부한 제자들은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의병장만 해도 수백 명이 나왔다고 한다
남명에게 공부한 제자들은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의병장만 해도 수백 명이 나왔다고 한다 ⓒ 이종찬

지난 달 25일(토) 오후 1시. 경남 하동 옥종 출신의 정규화(56) 시인과 함께 찾은 산천재(山天齋,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산천재는 퇴계 이황 (退溪 李滉,1501~1570) 선생과 더불어 조선 중기 대표적인 학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선생이 61세부터 72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머물던 곳이다.

지리산 깊은 계곡을 휘돌아 흘러내리는 티 없이 맑은 덕천강. 남명은 61세에 덕천강이 흐르는 이 곳, 천왕봉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덕천강변에 산천재를 짓고 돌아가실 때까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남명은 퇴계와 같은 해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퇴계 또한 남명처럼 처음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려 70여회에 걸친 왕의 부름을 마다 했다. 하지만 퇴계는 결국 벼슬길에 나아가 예조판서, 대제학 등 평생 82개의 숱한 관직을 누리며 당대 최고의 학문을 뽐냈다. 하지만 남명은 오로지 초야에 묻혀 경(敬)과 의(義)를 바탕으로 삼은 실천적 철학을 갈고 닦았다.

오죽 퇴계와 남명의 학문이 뛰어났으면 그 당시 사람들이 '경상좌도의 퇴계, 경상우도의 남명'이라고까지 했겠는가. 한 가지 재미난 것은 두 분 다 비슷한 때에 서실(書室)을 지었다는 점이다. 남명은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山天齋)를, 퇴계는 안동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었으니, 영웅은 당대에 짝을 이루어 나타난다는 옛말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닌 듯하다.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지리산 천왕봉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지리산 천왕봉 ⓒ 이종찬

산천재 들머리 잔지밭에 놓여있는 기묘한 형상의 돌 세 개
산천재 들머리 잔지밭에 놓여있는 기묘한 형상의 돌 세 개 ⓒ 이종찬

사적 제305호 산천재를 찾아가는 산청군 길목 곳곳에는 물외(오이)와 가지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다랑이 밭둑 곳곳에는 하얀 개망초꽃과 노오란 상추꽃도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산청군과 하동군을 가로지르는 덕천강의 강물도 거무스레하게 보이고, 지리산은 배꼽 아래만 드러낸 채 구름 속에 숨어 있다.

산천재는 산청군 시천면 사리 마을 끝자락, 20번 국도와 덕천강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유명한 의병장이었던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하여 오건, 정구, 김우옹, 최영경, 조종도 등 의병장만 수백 명을 길러냈다는 남명의 산천재. 산천재 들머리 잔디밭에는 희귀한 모습의 돌이 세 개 놓여 있다.

맨 앞에 놓인 돌은 거북이가 고개를 잔뜩 치켜들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이며, 그 뒤에 놓인 두 개의 돌은 마치 거북이가 남긴 발자국처럼 찍혀 있다. 이 돌은 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남명이 이곳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제자들을 가르칠 그때에도 이 세 개의 돌이 저런 모습으로 놓여 있었을까.

산천재 맞은편에는 '남명학연구원'이라는 간판이 붙은 자그마한 기와건물 한 채가 세워져 있다. 가까이 다가서자 대문 앞에 커다란 자물쇠가 수갑처럼 굳게 채워져 있다. 이런! 남명학연구원을 뒤로 하고 주인 잃은 산천재에 들어서자 널찍한 잔디밭 한 귀퉁이에 황갈색 원추리꽃 서너 송이가 활짝 피어나 나그네를 반긴다.

산천재 잔디밭 한 귀퉁이에는 원추리꽃이 예쁘게 피어나 있다
산천재 잔디밭 한 귀퉁이에는 원추리꽃이 예쁘게 피어나 있다 ⓒ 이종찬

지금은 도로가 생겨 밭으로 변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으로 덕천강물이 휘돌아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가 생겨 밭으로 변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으로 덕천강물이 휘돌아나갔다고 한다 ⓒ 이종찬

요즈음 신부전증 때문에 일주일에 피를 두 번씩이나 걸러야 하는 정규화 시인은 "산천재 아래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산천재 잔디마당 아래로 덕천강물이 휘돌아 나갔다"고 귀띔한다. 그리고 맑은 날 이곳 산천재에 앉아 지리산을 바라보면 천왕봉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오늘은 날씨가 흐려 보이지 않아 아쉽다며 한숨을 포옥 내쉰다.

안내 자료에 따르면 산천재는 조선 명종 16년, 1561년에 남명이 손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에 타버린 뒤 한동안 방치되었다고 한다. 그 뒤 순조 17년, 서기 1817년에 다시 고쳐 지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특별한 것은 없다. 잔디가 곱게 깔린 자그마한 마당에는 '산천재'라는 이름이 붙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자그마한 본채와 정면 2칸의 아래채, 남명의 고서와 목판각이 보관되어 있는 초라한 서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4호)가 하나 딸려 있을 뿐이다. 일평생을 초야에 묻혀 살아온 남명의 속내를 사실 그대로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산천재'라는 글씨가 걸린 간판 위에는 희미한 그림이 몇 점 그려져 있다. 정규화 시인의 말에 따르면 저 그림은 "밭을 가는 농부와 소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 신선들, 개울에서 귀를 씻고 있는 선비의 그림"이라고 한다. 하지만 누가 언제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안내 자료에도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아 몹시 아쉽다.

초야에 묻혀 산 남명의 올곧은 정신처럼 단촐한 산천재 건물
초야에 묻혀 산 남명의 올곧은 정신처럼 단촐한 산천재 건물 ⓒ 이종찬

'산천재' 간판 위에는 희미한 그림이 몇 점 그려져 있다
'산천재' 간판 위에는 희미한 그림이 몇 점 그려져 있다 ⓒ 이종찬

산천재 낡은 마루에 은근슬쩍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으면 구름에 휘감긴 지리산과 푸르른 들을 가로지르는 덕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만 맑았더라면 그때 남명이 마루에 앉아 오래 바라보았던 지리산 천왕봉과 주봉들을 볼 수 있었으련만. 만약 그랬다면 나그네도 남명의 깊은 속내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처음부터 단청을 아예 칠하지 않은 것 같은 툇마루 네 기둥에는 남명이 "상제가 사는 천왕봉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읊은 '덕산복거'(德山卜居, 덕산에 터를 잡고서)라는 시가 걸려 있다. 산천재 건너편 언덕 위에는 남명의 묘가 있는데, 이 묘터는 남명이 살아생전 직접 잡아놓은 곳으로 알려진다.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하늘 가까운 천왕봉 마음에 들어서라네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을건가?
십리 은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남명 조식, '덕산복거'(德山卜居, 덕산에 터를 잡고서) 모두


남명의 고서와 목판각이 보관되어 있는 초라한 서재
남명의 고서와 목판각이 보관되어 있는 초라한 서재 ⓒ 이종찬

덧붙이는 글 | ☞가는 길/서울-대진고속도로-함양나들목-생초, 산청나들목-단성나들목 사거리 우회전-20번 국도-면화시배지-산천재
※이 기사는 <시민의신문>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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