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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동상
명성황후 동상 ⓒ 양허용

이 분이 바로 정치적인 격변의 세월 속에서 흥선 대원군, 그리고 여러 열강과의 힘든 줄다리기를 하다가 일본 자객들의 칼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조선의 국모이구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가슴이 막막해져 왔다. 가슴 속에서 울컥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그 억울하고 기막힌 죽음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동상 왼편으로 그분이 태어나 자랐다는 생가가 보인다. 이곳은 1687년에 왕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된 곳으로 명성황후는 1851년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후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했던 아버지를 따라 안국동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8년 동안을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공부를 하던 방이 있던 자리에는 그분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는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라 쓰인 기념비가 서 있다.

명성황후가 태어났음을 알려주는 기념비
명성황후가 태어났음을 알려주는 기념비 ⓒ 양허용

일국의 국모가 나고 자란 집이라 하여 큰 규모를 상상했건만 그리 크지가 않다. 오히려 세도 있는 명문 양반집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조그맣고 소박한 집에 불과하다. 이런 초라한 곳에서 태어나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그 영민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명성황후는 16살의 나이에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민씨의 추천으로 한 살 어린 고종과 결혼하여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 후 세자책봉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흥선대원군과 정치적 대립을 하다가 고종 10년인 1873년에 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고종의 친정(親政) 체제를 갖춘다.

이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는 등 개방 정책에 앞장서지만 대원군과의 지속적인 힘겨루기가 이어진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 농민운동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정권을 잃지 않았던 명성황후는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에 조선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러시아 등과 손을 잡고 일본을 견제한다.

명성황후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일본인들은 대원군의 동의 하에 1895년 10월 8일 새벽을 틈타 일본의 군대와 낭인으로 하여금 궁궐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체를 불태워 뒷산에 유기한다. 이 사건의 작전명은 ‘여우사냥’ 이었다. 이후 친일정권에 의해 서인으로 강등되었으나 곧 복위 되었고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뀌면서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명성황후 생가의 모습
명성황후 생가의 모습 ⓒ 양허용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성황후는 경복궁 내 옥호루라는 곳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옥호루가 아닌 궁궐 마당에서 여러 자객들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칼에 난자당한 채 잔혹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생가를 지나니 기념관이 보인다. 고종을 비롯하여 명성황후와 관련되어 있는 수많은 역사적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평소 같으면 그냥 건성으로 지나쳐버릴 자료들이건만 그 때의 사건이 주는 충격 때문일까 문서 하나에도 유난히 눈길이 간다. 다른 곳에서는 잘 보지 않던 디오라마 상영관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숨을 멈춘 채 을미년 당시의 상황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명성황후 기념관 내에 걸린 고종과 명성황후의 영정
명성황후 기념관 내에 걸린 고종과 명성황후의 영정 ⓒ 양허용

그런데, 기념관을 중간쯤 돌아섰을 때 갑자기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리 진열장 안에 보관되어 있던 한 전시품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 숨을 멈추게 만든 물건은 다름 아닌 장도였다. 표면에 한자로 무엇인가 쓰여 있는 칼집이 있고 그 바로 아래 시퍼런 날을 번뜩이는 칼날. 안내문을 보니 그 칼이 바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데 쓰인 칼의 복사품이라고 한다.

저 칼이 바로 일국의 국모를 난자한 칼이라니…. 가슴이 벌렁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움이 치솟았다. 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그 칼집에 새겨진 글귀였다.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 조선의 국모에게 ‘여우’ 운운하며 자랑스럽게 그 비극적인 상황을 칼집에 새겨 넣다니….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역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에게 당시의 사건을 설명하다가 그만 목이 메고 말았다.

갑자기 몇 해 전에 읽은 김진명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이 떠올랐다. 차라리 그 소설의 결말이 통쾌한 복수였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가슴이 답답해져 더 이상 기념관을 둘러볼 수 없어 서둘러 밖으로 나섰지만 기념관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시는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할 가슴 아픈 오욕의 역사이건만 요즘 일본은 또 어떠한가. 아직도 일본인들은 그들이 저지른 가슴 아픈 만행들에 대해 반성하지 못한 채 망발과 망언을 일삼는 자들이 많지 않은가.

나만의 생각일 뿐이지만 요즘 일본의 우익 세력들의 움직임을 보면 그 가슴 아픈 과거의 역사가 다시 되풀이 되지는 않을까 하여 자못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두 달쯤 전에 명성황후 시해범 중 하나인 ‘구니토모 시게아키’라는 자의 외손자가 찾아와 지난 역사에 대해 무릎 꿇고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 자기 조상이 한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그의 가슴 속에서 한국 사람들 모두에게 치욕을 안겨준 역사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이 들었을지는 의문이다.

명성황후의 생가는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을 숨긴 채 지금은 조각공원으로 변하여 가족 단위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쉬어가는 휴식처로 변해 있었다. 깔깔거리며 달려가는 아이들, 명성황후 동상 앞에서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밝게 웃는 젊은 부부의 모습들. 하지만 그들은 그 치욕적이고 가슴 아픈 역사를 아이들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명성황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가족들의 휴식처로 변한 명성황후 생가터의 평화로운 풍경
가족들의 휴식처로 변한 명성황후 생가터의 평화로운 풍경 ⓒ 양허용

역사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냉정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개방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봉건주의를 허물어 새 질서를 만드는 책임이 명성황후와 정권을 쥔 민씨 일가에게 있었으나 이를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채, 부패를 일삼으며 외세에만 의존한 무능한 정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적 지식이 짧은 나로서는 그 당시 명성황후와 민씨 일가의 정치적 능력이 어떠했는지 평가하기 힘들다. 그 평가는 역사학자들과 같은 전문가들의 몫이라 생각된다. 다만, 정치적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서 일국의 국모가 일개 일본인 사무라이들의 손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됐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만은 어떠한 경우라도 용서 받을 수 없으며 정당화될 수 없다는 생각일 뿐이다.

어디선가 홀연히 뻐꾸기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왠지 명성황후의 통곡인양 처량하게만 들렸다. 겨우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보냈건만 명성황후 생가에서 혈관 한 줄기가 꽉 막히는 듯한 심장의 통증을 느끼고 돌아섰다. 아, 우리는 어찌하여 반만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키지 못하고 이렇듯 치욕스러운 순간을 역사책 한 쪽에 끼워 넣어야만 했단 말인가!

명성황후 추모비
명성황후 추모비 ⓒ 양허용

덧붙이는 글 | 명성황후 기념관의 안내문과 여주군청 홈페이지, 그리고 일부 인터넷 자료를 참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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