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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독 풀어주는데 그만인 생대구탕
ⓒ 이종찬

내 너가 있어 밤새 소주를 마신다
내 너가 내 곁에 없었다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치미는 슬픔과 분노를 어찌 달랠 수 있었으랴
잊을만하면 파도처럼 달겨드는 그리움을 어찌 지울 수 있었으랴
내 너가 있어 삶과의 씨름에서 지더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다
내 너가 있어 가슴의 피멍 지우고 다시 삶의 씨름장에 나선다

- 이소리 '생대구탕' 모두


그 바다에 가면 밤새도록 깡소주를 마셔도 걱정이 없다. 그 항구에 가면 밤새도록 악을 쓰며 노래를 불러도, 밤새도록 파도처럼 으르렁거리며 울어도 걱정이 없다. 그 부둣가에 가면 밤새도록 깡소주에 시달린 속이 아무리 쓰려도, 아무리 몸부림쳐도 어쩌지 못하는 세상살이 걱정에 뜬 눈으로 지새워도 아무런 걱정이 없다.

시퍼렇게 밝아오는 새벽, 울진 죽변항에 가면 밤새 마신 쓴 소주와 밤새 쓰디쓴 세상살이에 대해 떠들던 아픈 속을 후련하게 씻어주는 시원한 생대구탕을 파는 식당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원하고 칼칼한 생대구탕을 후루룩 후루룩 마시다 보면 어느새 쓰린 속과 피로가 한꺼번에 깨끗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지금 울진 죽변항 부둣가에 나가면 이른 새벽마다 푸르른 동해에서 갓 잡은 싱싱한 생대구가 지천에 깔려 있다. 눈빛 맑고 몸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그 생대구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손짓을 몇 번 하고 나면 부둣가에 수북이 쌓여 있던 생대구가 눈 깜빡할 새 어디론가 사라진다.

▲ 동해에서 건져올린 싱싱한 생대구
ⓒ 이종찬

▲ 죽변항 부둣가에 앃여있는 생대구
ⓒ 이종찬

왜 그럴까. 죽변항 가까운 바다에서 갓 잡은 싱싱한 생대구는 먼 바다에 나간 원양어선들이 끌어올려 냉장고에서 얼린 대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맛과 신선도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생대구탕은 일반 대구탕보다 가격이 비쌀 뿐만 아니라 동해안 주변이 아니면 쉬이 맛보기 어려운 음식이기도 하다.

대구는 입이 커서 '대구'(大口)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몸집보다 머리가 훨씬 커서 '대두어'(大頭魚)라고 불리기도 하는 한대성 바다 물고기다. 대구는 꽁치나 청어보다 지방이 아주 적고 맛이 담백하여 비린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즐겨 찾는 물고기다. 특히 대구는 버리는 부분이 거의 없고 아가미와 눈, 알, 껍질까지 모두 먹을 수 있는 영양소의 보고다.

1809년, 조선 순종 9년에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부녀자를 위하여 엮은 여성생활백과 <규합총서>에 따르면 "대구는 동해에서만 나고 중국에는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이 문헌에는 나오지 않으나 중국사람들이 진미라 하였다"고 적혀 있다. 또한 조선 숙종 때 실학자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 1664∼1715)이 농업과 일상생활에 대해 적은 소백과사전 <산림경제>에서는 "대구어의 알에 간을 해두면 맛있고 담백하여 먹기 좋으며, 동월(冬月)에 반건(半乾)한 것이 아주 좋다"고 되어 있다.

생대구는 약효 또한 뛰어나다. 싱싱한 생대구 한 마리를 물에 씻지 않고 그대로 달여 먹으면 구충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젖샘에 염증이 생겨 젖이 곪는 종기(유종)에는 대구의 껍질을 물에 담갔다 붙이면 젖멍울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대구는 몸이 허약한 사람들의 보신용으로도 아주 좋으며, 탕으로 끓여먹으면 주독을 풀어주는 데 그만이다.

▲ 죽변항 들머리 생대구탕으로 이름 높은 돼지식당
ⓒ 이종찬

▲ 생대구탕은 젖이 모자라는 산모에게도 아주 좋다
ⓒ 이종찬

"생대구탕은 술 많이 마신 그 다음 날 속풀이에 그만이니더. 제 아무리 주독이 까불어쌓아도 생대구탕한테는 꼼짝을 못한다 아이니껴. 예로부터 이 고장 사람들은 젖이 부족한 산모에게 생대구탕을 자주 끓여 먹었니더. 그러고 나면 생대구탕 국물처럼 뽀얀 젖이 나온다고 하니더."

지난 3일 오후 12시. 나의 울진길라잡이 남효선(47) 시인과 함께 찾은 울진 죽변항 들머리 해물잡탕 전문점 '돼지식당'(김수영, 죽변면 죽변4리). 10평 남짓한 허름한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제법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앉은 손님들이 땀을 비 오듯이 쏟으며 생구탕을 맛있게 먹고 있다.

'대성이 엄마'라고 불러달라는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주인 아낙네에게 생대구탕을 시키자 "소주는요?"하고 되묻는다. 마치 생대구탕을 먹기 위해서는 소주를 밑반찬(?) 삼아 먹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투다. 그렇지 않아도 밤새 마신 깡소주에 시달린 쓰린 속을 풀려왔는데 또 소주라니.

소주, 소리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자 남효선 시인이 눈웃음을 툭툭 던지며 주인 아낙네에게 소주 두어 병 빨리 달라고 재촉한다. 소주 한 병도 아니고 두어 병이라니. 그때 남효선 시인이 내 허리를 쿡 찌르며 "이열치열이라고, 뜨거운 생대구탕은 찬 소주를 곁들여 먹어야 속이 확 풀리니더" 한다.

▲ 시원하고 깔끔한 깊은 맛이 일품인 생대구탕
ⓒ 이종찬

▲ 소주 한 잔 입에 털어넣고 후루룩 쩝쩝 먹는 생대구탕의 시원하고도 담백한 맛을 어디에 비길 수 있으랴
ⓒ 이종찬

그렇게 잘 익은 깍두기를 안주 삼아 쓴 소주 몇 잔을 홀짝거리고 있을 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생대구탕이 커다란 냄비에 담겨 가스렌지 위에 올려진다. 톡, 가스불 켜지는 소리와 함께 "주방에서 다 익혀서 나오기 때문에 지금 드셔도 되니더"하는 주인 아낙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꽤 정겹다.

"여기 생대구탕은 도시에서 먹는 생대구탕과는 맛이 틀리니더. 우리는 매일 새벽마다 죽변항 부두에 나가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생대구만 가져오니더. 그러니까 그날 팔 만큼의 생대구만 가져온다 이 말이니더. 매일 새벽 죽변항에 나가면 지천으로 깔린 게 생대구니까 굳이 욕심을 부려 많이 사놓을 필요가 없다 아이니껴."

생대구 특유의 구수한 내음을 풍기며 보글보글 끓고 있는 생대구탕.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생대구탕을 바라보자 이마와 목덜미에 금세 땀방울이 송송 솟아나는 것만 같다. 소주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생대구탕의 뽀오얀 국물을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자 그 구수하고도 시원한 맛에 절로 눈이 번쩍 뜨인다.

아, 입천장을 데일 것만 같은 뜨거움이 까끌거리는 입속을 금세 스르르 풀어내는 이 시원하고도 구수한 맛. 세상에, 이렇게 깔끔하고도 담백한 국물이 있었다니. 보기에는 그저 희멀겋게 보이는 이 생대구탕이 밤새 소주에 시달린 쓰라린 속을 순식간에 정리해 줄 줄을 어찌 알았으랴.

▲ 땀을 비오듯이 쏟으며 생대구탕을 먹고 난 뒤 바라보는 죽변항의 멋진 풍경도 그만이다
ⓒ 이종찬

▲ 아름다운 죽변항에 정박한 고깃배들
ⓒ 이종찬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치 원수처럼 보이던 소주가 절로 들어간다. 소주 한 잔 털어 넣고 생대구탕 서너 수저 후루룩 마시고, 소주 한 잔 털어 넣고 생대구탕에 든 생대구의 부드러운 속살을 발겨먹는 이 기찬 맛. 소주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생대구탕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감칠맛. 그 깊고 오묘한 맛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으랴.

그래. 그동안 나는 여러 가지 음식을 먹어왔다. 숙취해소에 좋다는 복국을 비롯한 콩나물해장국, 버섯낙지전골, 사골곰국, 시금치된장국 등 참으로 많은 음식을 먹어왔다. 하지만 그 많은 음식들도 금세 쓰린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지는 못했다. 근데, 생대구탕의 국물 몇 수저에 오랜 숙취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씻겨져 내렸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방울과 함께.

"저희 집에서 생대구탕을 끓이는 특별한 비법은 없니더. 그저 냄비에 무를 깔고 고춧가루를 조금 뿌린 뒤 파, 마늘, 생강을 넣고 팔팔 끓이다가 토막을 낸 생대구와 콩나물을 넣으면 되니더. 그리고 마지막에 청주를 조금 붓고 미나리와 쑥갓을 올리면 향긋한 맛이 더해진다 아이니껴."

속풀이 대명사 생대구탕 이렇게 끓이세요
얼리지 않은 싱싱한 생대구 사용해야 제맛

▲ 뽀오얀 국물이 잘 우러난 생대구탕
ⓒ이종찬

재료/ 생대구, 무, 두부, 미나리, 대파, 콩나물, 매운고추, 마늘, 생강, 쑥갓, 소금, 후추, 청주

1. 얼리지 않은 싱싱한 대구의 내장을 꺼낸 뒤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손질하여 5~6cm 크기로 토막을 낸다.

2. 무와 두부는 네모 반듯하게 썰고, 미나리는 5cm 길이로 썬다.

3. 대파, 매운고추는 어슷하게 썰고, 고추의 씨는 모두 털어낸다. 고추씨가 있으면 보기에도 좋지 않고 먹기에도 불편하다.

4. 콩나물은 머리와 꼬리를 모두 떼낸 뒤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뺀다.

5. 냄비에 무를 깔고 고춧가루, 마늘, 생강, 매운고추를 얹은 뒤 물을 붓고 센불에서 팔팔 끓인다.

6. 냄비에 담긴 무가 익을 때쯤 대구와 콩나물을 순서대로 넣고 센불에서 다시 한번 팔팔 끓인다.

7. 냄비에서 김이 허옇게 피어오르면 두부와 대파, 미나리를 넣고 중간불에서 끓이다가 소금, 후추로 간을 맞춘 뒤 청주(소줏잔 한 컵 정도)를 붓고 쑥갓을 얹으면 끝.

※맛 더하기/생대구탕을 끓일 때 멸치 다싯물을 사용하면 깊은 감칠맛이 나며, 얼큰한 맛을 즐기려면 고추장을 뜸뿍 넣는 것도 조리의 지혜. / 이종찬 기자

덧붙이는 글 | ☞가는 길/서울-원주-제천-영월-태백-호산-부구터미널-죽변터미널-죽변항-돼지식당(054-783-8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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